金稱烈
稱烈1895 ~ 1922.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 · 대한광복군총영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95년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잠도면(蠶島面) 대평리(大坪里)에서 의병장(義兵將) 김관수(金觀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관수는 1907년 11월 1일 덕천군에서 “왜적(倭賊)을 물리치고 난신(亂臣)을 죽여 선왕(先王)의 도(道)를 부식(扶植)한다”는 성명(聲明)을 내고 창의하였다. 김관수는 모집한 의병 중에서 용의군(勇義軍)을 선발하여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한 뒤, 4~5백 명을 거느리고 맹산군(孟山郡)을 공격하여 관아를 점거하는 등 덕천·구룡포(九龍浦)·맹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아버지와 형 등이 모두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으므로 평소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앞장섰다. 그리고 1920년에는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大韓獨立靑年團聯合會)에 가입하여 재무부장(財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는 만주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항일무장단체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모체로 결성되어 각지의 청년 단체를 망라하여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하였다. 1919년 말 조직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그 교통기관(交通機關)을 후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와 국내의 독립운동단체를 연계하여 활동을 전개하고, 일본인과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3월 평안남도 맹산·덕천(德川)·영원(寧遠) 등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문서 배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6월 평안남도 영원에서 형 김병렬(金炳烈)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탈출한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2년 6월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과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이백현(李白鉉) 등 동지 2명과 함께 폭탄과 권총을 소지하고 국내로 들어왔다. 남부 지방으로 향하던 중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동흥면(東興面) 쌍남동(雙南洞) 상창주재소(上倉駐在所) 앞에 이르러 숙소를 정하고, 함께 행동하던 독립 단원 1명이 파수를 보는 사이에 이백현과 함께 잠이 들었다. 이날 밤 정보를 입수한 상창주재소 순사 4명의 기습을 받았는데, 당시 파수를 보던 1명은 총을 쏘며 도망하였고, 이백현과 함께 교전하던 중 경관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행장에는 ‘대한청년단 경시(大韓靑年團警視)’라는 첩지(牒紙)와 폭탄 2개, 권총 2정, 탄환 8천 발이 들어 있었고, 이백현의 행장에는 ‘대한청년단 부경시(大韓靑年團副警視)’라는 첩지와 『독립신문』 8천 장, 그리고 기타 독립문서 다수가 들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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