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용
金晋鏞1889. 1. 12 ~ 1958. 8.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학회
- · 대한흥학회
- · 한성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1월 12일 서울 도렴동(都染洞)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단정(檀庭)이고, 이명은 김진용(金晋庸)이다. 1905년 관비유학생으로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敎)에 다니고 있었다. 1905년 11월 28일 을사늑약 체결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자퇴 의사를 표명할 정도로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졌다. 1907년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간행하던 신문의 ‘경기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08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률전문과에 다니면서 유학생 단체인 대한학회(大韓學會)에서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9년 1월 대한학회·태극학회(太極學會)·공수학회(共修學會)·연학회(硏學會)가 통합하여 창립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의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중국으로 갔다가 일시 귀국 후 일본 경찰에 구속된 뒤 석방되어 1913년 봄 재차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중국 혁명파 인사들인 쑨원(孫文)·황싱(黃興)·리례쥰(李烈鈞)·천치메이(陳其美)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리례쥰이 장시성(江西省) 호구(湖口)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대항하는 토원군(討袁軍)을 일으키자, 총사령부의 고등고문관장으로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토원군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는 한인들과 안창호(安昌浩)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 김영일(金永一) 등과 상하이에 이풍양행(移豊洋行)이라는 비밀기관을 만들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14년 11월 23일 신규식(申圭植) 등의 전송을 받으며 홍명희(洪命熹)·김덕진(金德鎭)·정원택(鄭元澤)과 상하이를 출발하여 홍콩, 필리핀, 보르네오를 거쳐 1915년 3월 4일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다. 동남아시아 화교사회 등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사가 목적이었다. 싱가포르에 정착한 일행은 직접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하였고, 1916년경부터는 말라까Malacca 근처의 고무공장 운영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석 광산에 투자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 혁명파들과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동남아시아 지역 화교들이 ‘혁명파’ 언론인 허하이밍(何海鳴)에 보내는 군자금 전달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1917년 말에 이르러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 혁명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중국계 자금을 지원받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으로 돌아간 후 1919년 4월 국내 13도 대표가 조직한 한성정부의 평정관(評政官) 1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법무총장 신규식 일행이 쑨원과의 회담을 위해 광저우(廣州) 호법정부(護法政府)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이때 외교부원으로 회담에 앞서 파견되어 사전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광저우에서 주녠주(朱念祖)·딩샹쳰(丁象謙) 등 광저우 비상국회 의원들과 중한협회(中韓協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행적은 파악되지 않지만, 1920년대 일제 정보자료에 ‘홍콩에서 활동하는 과격분자’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홍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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