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태
金誌泰1911. 7. 27 ~ 1937. 5. 2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공산당
- · 전라남도 노농협의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5)
관련 사건
- · 전라남도 노농협의회 사건
- · 광양 비밀결사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5) 1911년 7월 27일 전라남도 광양군(光陽郡) 광양면(光陽面) 인동리(仁東里)에서 태어났다. 1925년 3월 광양공립보통학교(光陽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부친과 함께 다른 사람의 토지를 소작하였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약 4개월 동안 후쿠오카(福岡),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등지에서 직장을 구하다가 귀향하였다. 1931년 여름 무렵 전라남도 노농협의회(勞農協議會)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박경래(朴埛來)의 설득으로 정학규(鄭學圭)와 함께 광양지역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배경으로 조직된 전라남도 노농협의회는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전남지역의 17개 단체가 통합·설립되었다. 1931년 4~5월경 곡성·구례·광양·여수·순천·고흥지역 책임자였던 정시환(鄭時煥)은 박영진(朴永震) 등과 ‘공산주의 지역운동’을 확산시킬 방법에 대해 수차례 협의하고, 계, 야학, 소비조합 등 합법적 조직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구체적인 조직대상은 광양지역 광산노동자였다. 1931년 11월경부터 박경래의 집 등에서 『공산주의 입문』, 『노동과 자본』, 『봉화(烽火)』 등의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조직 확대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한편 1931년 12월 중순 경 박경래와 함께 정시환·박영진과 만나 비밀결사의 조직 형태로 반제부(反帝部)·재정부·광산노동부·농민부의 4개 부서를 두기로 하였다. 반제부는 각종 계를 조직하여 조직원의 의식 교양을 책임지기로 하였고, 재정부는 조직원들에게 최저 50전 이상의 회비로 거둔 자금을 관리하였다. 농민부에서는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 교양을 담당하였고, 광산노동부는 금광산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때 광산노동부의 책임자로 결정되었다. 1931년 12월 23일 노동자 10여 명을 모아 인동리 노동계를 조직하고 야학을 시작하였으며, 1932년 2월경에는 인동리에 거주하는 김대수(金大洙)·양선동(梁先同)과 함께 소그룹 비밀결사를 구성하였다. 박경래 또한 1931년 12월 24일 칠성리(七星里) 노동계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2년 6월 박경래가 ‘전라남도 노농협의회 사건’으로 붙잡히면서 광양지역 조직도 일시 정돈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정학규·박기동(朴基棟)·박봉두(朴鳳斗)와 조직 재건에 대해 협의한 결과 그룹 제도를 채택하였다. 광산노동부는 박봉두·박기동, 농민부는 정학규, 반제부는 김기선(金基善)이 담당하였고, 재정부 책임자이면서 전체 지도를 맡았다. 또 대중 획득 수단으로 노동계를 만들고, 내적으로는 각 부의 책임자들이 다시 소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각종 서적과 잡지는 그의 통제 하에서만 배부키로 결정하는 등 비밀 유지에 유념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933년 9월 2일 구속되었다. 1934년 10월 9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의 예심을 거쳐 1935년 7월 1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미결 구류 일수 365일 본형에 산입)을 받고, 2년여 만에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