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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元

正元

1880. 7. 21 ~ 1961.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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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正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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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울산(蔚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울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울산군 언양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5) 1880년 7월 21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상남면(上南面) 명촌리(鳴村里, 현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에서 태어났다. 유학자 명헌(鳴軒) 김지(金志)의 후손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40세였으며, 품팔이꾼이었다. 울산군 언양(彦陽)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하순 천도교 계통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고종(高宗)의 인산(因山) 참배를 위해 서울에 체류 중이던 천도교 울산교구장 김교경(金敎慶)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문을 울산교구로 보냈고, 이에 울산교구는 이규장(李圭章)을 서울로 급파하여 독립선언문과 거사 지시를 받아 돌아왔다. 울산교구는 7인의 교구 중진회의를 개최하여 4월 2일의 언양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주도 인물들은 독립선언문 등사, 태극기 제작, 조직 연락과 동원을 맡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이 때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퍼져 나가자 일제 경찰은 예비검속령을 발표하고, 일부 주도 인물을 주재소로 끌고 갔으나 곧 풀려나면서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계획을 전해 듣고 그 뜻에 찬동하여 거사 예정일인 4월 2일 언양 시장으로 나갔다. 울산군의 상남(上南)·중남(中南)·삼동(三同)·두동(斗東)·두서(斗西)의 각 면과 양산군(梁山郡) 하북면(下北面)에서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뜻을 함께 한 청년들이 준비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여러 뭉치로 나눠 시장에 운반해 두고, 11시에 일제히 의거를 일으킬 예정을 알리면서 상인과 상점을 철시케 하였다. 거사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시장을 감시하며 돌아다녔다. 4월 2일 오전 11시 ‘대한독립만세’의 선창에 따라 시위 군중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자,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많은 군중을 권유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선동하였다. 조선독립기라고 쓴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과 함께 읍내시장(邑內市場) 남부리(南部里) 도로를 행진하였다. 만세시위가 격렬해짐에 따라 일제 경찰들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공포를 쏘면서 앞에 있던 시위대부터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경찰들이 주도 인물 몇 명을 언양주재소로 끌고 가자,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으로 일본 군경에 맞섰다. 시위 군중 대열이 육박해 오자 일제 경찰과 수비대는 무차별 실탄 사격을 감행하였고, 총격에 의해 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붙잡혀, 1919년 4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그 해 5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하였으나 형량은 그대로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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