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술
金在述1886. 8. 10 ~ 1944. 12.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
- · 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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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6년 8월 1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연평동(蓮坪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城內洞)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영해면 만세시위는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平洞)의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의 발의와 낙평동 교회 구세군 참위 권태원(權泰源) 및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 종사자들이었으나, 기독교 신자의 동원에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의 토착 유림의 규합에도 노력하여 만세시위를 위한 기독교와 유림의 연합이 구축되었다. 영해면 장날인 3월 18일의 군중들과 시위에 참가하였다. 오후 1시경에 정규하·남여명(南汝明)·권영조(權永祚)·박희락(朴羲洛) 등의 독립만세 선창으로 만세시위는 시작되었다. 김실광(金實光)·김성욱(金聲旭)·조영한(趙榮漢)·김원발(金源發)·손영세(孫永世)·김치운(金致雲)·이상화(李祥和)·장성렬(張星烈)·김학이(金鶴伊) 등과 함께 군중 속에서 만세를 따라 부르며 행진을 이끌었다. 시위대는 영해경찰관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르고 영해공립보통학교로 이동하여 훈도에게 학생들을 동원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시위대가 다시 주재소로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시위는 평화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가 해산을 강제하자 시위는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주임순사는 물론 그 휘하의 순사 야마구치(山口眞一), 순사보 진익조(陳益祚)·김여송(金麗頌)·권상식(權相植)을 구타하고, 그들의 제복・제모・패검 등을 훼손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여 주재소는 지붕과 기둥만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 시위대는 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영해우편소 등에 대한 시설 파괴를 이어갔다. 오후 2시경 시위대 중 일부는 병곡면을 향하였다. 시위대는 영해에서와 마찬가지로 병곡면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주재소의 경찰 3명은 시위대를 피해 백석동(白石洞)으로 달아났다가 평해 헌병분견소 인원과 합세하여 시위 진압을 위해 군중에게 총을 겨누었다. 시위를 지휘하던 정규하는 군중의 희생을 우려하여 해산을 종용하였고, 그에 따라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19일에도 영해의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오전 10시경에는 포항의 헌병대가, 오후 5시경에는 대구의 보병 80연대가 증파되었다. 진압부대의 실탄 사격으로 인해 8명의 사망자와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대 해산 이후 시위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징역 2년을 유지하여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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