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在洙
在洙1900. 6. 2 ~ 1949. 6.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병영청년회
- · 기미계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울산군 하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5) 1900년 6월 2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동리(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삼척(三陟)이며, 호는 일야(一野)이다. 1919년 4월 4~5일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兵營里)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하상면 병영지역은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있던 곳이다. 이 지역 청년들의 애국정신이 강하였는데, 1906년 설립된 사립 일신학교(日新學校) 출신 청년들의 비밀결사인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가 조직되어 있었다. 병영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평소 항일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서울에서 유학하던 지역 청년들이 만세운동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에 대한 소식을 병영청년회에 전달하였다. 그러자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게 되었고, 이현우(李鉉禹)·이종욱(李鍾旭)·이문조(李文祚)·박영하(朴永夏)·이종근(李鐘根)·양석룡(楊錫龍)·김장수(金長壽) 등의 간부들이 협의를 거듭해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2백여 매를 인쇄하고 태극기 5백여 개를 제작하였으며, 종이와 명주를 이용하여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만들었다. 거사 당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품에 품고, 일신학교 교정으로 향하였다. 일신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축구경기로 위장한 후 오전 11시 40분경 축구공을 높게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높이 들고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서리(西里)·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를 돌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호응하면서 삽시간에 시위 군중의 수는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하상경찰관주재소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울산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가 선봉에 선 이들을 연행하고 시위 군중을 향해 총검을 휘둘러 진압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날 저녁 일본 경찰의 검거망을 피한 청년회 간부들과 함께 다음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동지들에게 연락하였다. 4월 5일 10시경 다시 ‘대한독립만세’ 깃발 아래 시가 행진을 시작하자 지역 주민들이 합세하였고, 오후 3시 일신학교에 집결한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인근 지역을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 검거한 주도 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다시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에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으며 수십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기미계(己未契)를 결성하여 항일 투쟁을 결의하고 4명의 순국 열사 추모제를 매년 4월 6일 비밀리에 지냈다. 기미계는 광복 후 3·1봉제위원회로 개명하여 추모제를 계속하다가, 1955년 객사였던 영모각(永慕閣)을 개수하여 삼일사(三一祠)로 명명하고 기미계를 울산병영삼일사봉제회로 개편하였다. 이후에도 4월 5일 순국열사들이 안장된 중구 서동 황방산에서 위령제를 개최하고, 4월 6일 삼일사 사당에서는 유족 등과 함께 제례행사인 고유제를 치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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