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이
姜碩伊186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4)
관련 사건
- · 구포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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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4) 1865년경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리(龜浦里)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55세로 구포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중순 부산과 동래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구포의 만세 시위가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구포면 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하면서 본격적으로 계획이 진행되었다. 3월 27일과 28일 임봉래·유기호(柳基護)·윤경(尹涇)·김윤길(金潤吉)·김옥겸(金玉兼)·허정(許楨)·김용이(金用伊) 등이 구포면 구포리의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蓮)의 집에 모여 논의를 거듭한 끝에 구포 장날인 3월 29일을 거사 일로 결정하였다. 밤을 새워가면서 독립선언서와 크고 작은 태극기 수백 매씩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9일 구포시장으로 나와 정오가 되자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상인들이 폐점하고 시위가 확대되자 출동한 경찰은 주동 인물 12명을 붙잡아 구포주재소에 구금하였다. 오후 3시경 주동 인물들의 구금 소식을 전해 듣고 임봉래·윤정은(尹正殷)·변봉엽(邊奉燁) 등의 주도하에 1,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구금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로 나아갔다. 주먹과 곤봉으로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의자와 책상 등 집기를 부수면서 구금된 인사들을 구출하고자 하였으나,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강제해산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일본인 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대 중 9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날 42명의 시위대와 함께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1919년 7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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