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利善
金善187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개성군 영북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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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경기도 개성군(開城郡) 영북면(嶺北面) 길수리(吉水里)에서 태어났다. 판결문에 따르면 1876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4월 개성군 영북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3일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송도면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과 충돌하였다. 3월 말부터는 만세시위가 진봉면(進鳳面)·동면(東面)·중서면(中西面) 등 농촌지역으로 확산되었다. 4월 1일부터 6일까지 영북면 길수리에서 김만수(金萬秀)·이호주(李浩周) 등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마을 주민을 불러 모아 만세시위 동참을 요구하고, 며칠간 이어진 만세시위에 직접 참여하였다. 영북면 시위는 기독교도와 주민이 결합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4월 1일 밤에는 기독교도 및 주민 200~300여 명과 함께 영북면사무소에 몰려들어 창문을 파괴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서류 상자를 훼손하였다. 다음 날인 4월 2일 밤에는 진봉면, 중면, 영북면 등 여러 마을의 사람들과 함께 산등성이에서 화톳불을 피우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길수리에서는 같은 면의 고덕리(古德里) 주민들과 2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4일에도 기독교도와 일반 주민 약 400명과 모여 만세를 불렀으며, 이 과정에서 5명이 붙잡혔다. 만세시위는 4월 6일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날 밤 9시경 양합리(兩合里, 면소재지인 길수리 내의 동리 명칭)에서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몽둥이를 들고 경계 중이던 헌병에게 돌을 던지며 거칠게 항의하였다. 또한 일제 치하에서 행정을 관장하던 영북면장의 집에 불을 질렀다. 시위대의 저항이 거세지자 경찰이 발포하면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4월 초에 이어진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1919년 5월 24일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에서 이른바 치안 방해와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스스로 범법한 사실이 없으며, 구타 등으로 발언권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며 경성복심법원에 항소를 제기하였다. 같은 해 7월 24일 항소가 기각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27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임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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