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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발

金源發

1870. 5. 29 ~ 1956.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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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원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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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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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경북 영덕군 영덕면
  • · 병곡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0년 5월 29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영동(榮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에는 영해면(寧海面) 묘곡동(畝谷洞)에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초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은 평양신학교로 유학가던 중 서울에서의 만세시위를 직접 목격한 후 유학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3월 12일 낙평동 교회의 구세군 참위 권태원(權泰源)에게 만세시위를 제안하였다. 권태원은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 교회의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함께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 장날을 만세시위 거사일로 정하고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남효직(南孝直), 남여명(南汝明) 등과 함께 영해면·병곡면·축산면(丑山面)·창수면(蒼水面) 등지의 기독교도와 영덕 지방의 대표적 유림의 5대 성씨(권씨·남씨·박씨·백씨·이씨) 문중을 규합해 나갔다. 3월 15일 정규하가 방문하여 모여있던 동지들에게 3월 18일에 만세시위를 할 예정이므로 주민들에게 그 뜻을 전달하고 각자 태극기를 휴대하여 참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참석자들은 정규하에게 들은 만세시위 계획을 각기 자신의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시위 당일 정규하·남여명·권영조(權永祚)·박희락(朴羲洛) 등은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대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시위장소에 도착해 이상화(李祥和)·조영한(趙榮漢)·손영세(孫永世)·남교문(南敎文)·김치운(金致雲)·장성렬(張星烈)·김학이(金鶴伊) 등과 함께 시위대를 독려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렬을 이끌었다. 시위대는 행진하면서 영해경찰관주재소의 주임순사 스즈키 쓰루지로(鈴木鶴次郞)와 순사보 등을 구타하고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영해공립보통학교, 영해공립심상소학교, 영해면사무소, 영해우편소 등도 차례로 공격하였다. 정규하·박희락·권영조·이상화·조영한·손영세·남교문·김치운 등과 함께 이웃한 병곡면으로 나아갔다. 정규하·박희락·권영조 등의 지휘 아래 400~500명의 시위대는 영해에서와 마찬가지로 병곡경찰관주재소와 병곡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주재소는 지붕 및 기둥만 남고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면사무소도 창유리와 문짝 등이 파괴되었다. 이때 병곡면 시위 당시 이상화·조영한·손영세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이끄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영덕군의 만세시위는 이튿날인 19일까지도 이어졌다. 포항의 헌병대와 대구의 보병 제80연대가 파견되었고, 실탄 사격까지 감행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후 시위 주도 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 이 일로 일제 헌병에 붙잡혀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그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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