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형
姜萬馨1891. 1. 15 ~ 1920. 2.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횡성면 3.1운동 소초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1년 1월 15일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소초면(所草面) 둔둔리(屯屯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하여 1919년 무렵 횡성면(橫城面) 영영포리(永永浦里)에 본부를 둔 천도교 횡성교구의 봉훈(奉訓, 천도교 순회 교사)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횡성교구 대교구장 최종하(崔宗河), 도훈(道訓) 이채일(李采一), 봉훈 신재근(申在根) 등과 함께 3월 13일 정곡면(井谷面) 상안흥리(上安興里)에 살던 천도교인 장도훈(張道勳)을 당시 서울에 있던 횡성교구 의사원(議事員) 이동구(李東求)에게 보내 독립선언서 40매와 태극기 20매를 구해왔다. 1919년 3월 27일 횡성 장날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횡성면·우천면(隅川面)·공근면(公根面) 등지에 배분할 때, 원주군 소초면을 담당하였다. 또한, 안경춘(安敬春)·김인경(金麟卿) 등을 통해 정곡면(井谷面)·갑천면(甲川面)·둔내면(屯內面)에도 배포하게 하였다. 3월 27일 횡성 장날 장터에서 300여 명이 모여 함께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3월 16일 춘천의 일본군 79연대에서 파견된 병력이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즉시 출동하여 주도자 12명을 구속하고 해산시켰다. 그다음 횡성 장날인 4월 1일에도 감리교인과 청년들과 연대하여 조직적인 만세 시위를 일으켜 오후 3시경에 시위대가 1,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시위대는 출동한 횡성 헌병분견소의 헌병 고지마(小島)를 말에서 끌어내려 구타하고 총소리에도 흩어지지 않는 대담성을 보였다. 시위대가 헌병분견소로 향하자 수비대의 발포로 그날 저녁에 5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관리들이 시체를 면사무소에 두자 시위에 참여한 둔둔리 사람들과 함께 같은 마을 사람인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의 시체를 찾아 메고 마을로 돌아왔다. 4월 5일 분노한 둔둔리 사람들을 이끌고 원주군 소초면 면사무소가 있는 평장리(平庄里)에 몰려가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헌병에게 주도자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1일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6월 6일 항소 기각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므로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은 부당하여 복종할 수 없다”라는 취지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7월 17일 기각 판결을 받았다.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20년 2월 28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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