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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金龍觀

1894. 10. 1 ~ 1932.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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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용관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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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영흥(永興)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영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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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1)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1) 1894년 10월 1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홍인면(洪仁面) 남산리(南山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19년 당시에는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고, 이후에도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5일 서울에서는 학생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아침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남대문역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보성법률상업학교생인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학교생인 김원벽(金元璧) 등과 함께 만세시위의 선두에서 시위대를 주도하였다. 시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대는 10,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둘로 나뉘어 한 갈래는 남대문시장을 지나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을 거쳐 종로의 보신각(普信閣)으로 향했고, 한 갈래는 남대문에서 대한문을 거쳐 보신각에 이르러 합류하였다. 일본 경찰이 만세시위를 저지하면서 주도자 등 50여 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개월을 받았다.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24년 6월 함경남도 영흥에서 삭풍회(朔風會)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7월부터 1925년 2월까지 영흥군 홍인면(洪仁面) 면장 배척 운동, 영흥농업보습학교와 영흥보통학교 동맹휴교, 고원군(高原郡) 소작쟁의 등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영흥청년회의 집행위원, 1927년 영흥소비조합 발기인을 역임하였으며, 중외일보 영흥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옥고로 인해 생긴 폐병이 심해져 요양하던 중 1932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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