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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淵

泰淵

1893 ~ 192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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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泰淵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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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장연(長淵)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장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상해대한인거류민단
  • · 대한적십자회
  • · 대한교육회
  • · 임시의정원
  • · 구국모험단
  • ·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93년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태어났다. 미국 북장로파의 교파에 속하는 기독교인으로 평양의 숭실학교(嵩實學校)에서 수학하고 동교(同校)의 중학과를 거쳐 1917년 3월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던 시기 『독립신문』에 게재된 문학작품 중 ‘용암(容庵) 김태연’ 이란 지은이명이 있어 ‘용암’을 호로 사용한 듯하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5월경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그 해 5월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 등이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1920년 9월 30일에도 상해대한인거류민단 의원으로 선출되어 상하이 한인들의 자치 활동을 돕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19년 7월 상하이에서 손정도(孫貞道)·김순애(金淳愛)·이희경(李喜儆)·안창호(安昌浩) 등이 임시정부의 후원과 전시(戰時)에 부상자 구호를 목적으로 재건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에서 상의원(常議員)이 되었으며, 1921년 11월 총회에서는 감사(監事)로 뽑혀 적십자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19년 8~9월경 제6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1년 9월 제9회 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常任委員會)의 청원 징계(請願 懲戒) 분과와 외교위원회 이사직을 담당하는 등 임시의정원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1920년 3월 19일에는 이유필(李裕弼)·윤현진(尹顯振) 등과 미국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大統領)이 2개월 이내로 임시정부에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결의안(決議案)을 17명 의원과 함께 서명하여 임시의정원에 제출하는 등 임시정부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6월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창설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에서도 중요 직책을 맡았다. 구국모험단의 단칙은 “작탄(炸彈)으로 구국의 책임을 부담함을 목적으로 하고,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희생을 불고(不顧)”한다는 것과 단원들은 “작탄수업 교수 및 제작의 의무”를 갖는다는 것 등이 핵심이었다. 구국모험단은 폭탄 제조 기술과 사용법을 습득하여 국내 각지 관공서 파괴와 요인 암살 임무를 전담하여 수행코자 하는 폭탄거사를 목표로 한 행동대였다. 구국모험단 참모부장에 선임된 뒤 서무부장 이영렬(李英烈), 기술부장 고일청(高一淸)·이춘숙(李春塾)·노태연(盧泰然)·김보연(金甫淵)·왕삼덕(王三德)·이탁·이석(李錫)·임득산(林得山) 등 주요 단원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영국인과 광둥인(廣東人)을 교사로 초빙하여 1919년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 20명,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김성근 외 7명에게 두 차례에 걸쳐 폭탄제조법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폭탄제조법 교육을 마친 후 실제 거사를 준비하던 중인 1920년 2월, 왕삼덕·이석·나오(羅伍) 등 3명의 단원이 프랑스조계 애인리(愛仁里)에서 폭탄을 제조하던 중 폭발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일본 경찰에 의해 단원 이석이 체포되었다. 구국모험단에서는 비밀리에 이루어진 폭탄제조가 사전 발각된 원인을 조사하던 중, 조선총독부에서 상해 파견 통역관의 밀정이 된 한국어통역관 김겸헌(金兼憲)의 밀고 때문이었음을 밝혀내고 4월 말 그를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이후로도 단원들이 각지에서 활동하며, 지방 유지·재산가·학교·종교단체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 8월 13일 홍진(洪震)·장붕(張鵬)·김인전(金仁全)·이탁(李鐸)·신현창(申鉉彰)·조상섭(趙尙燮) 등과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를 조직해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였다. 태평양회의는 미국·영국·일본·중국 등 9개국이 참여해 군비 축소 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였다. 그 해 8월 26일 제3차 총회에서 간사장 홍진(洪震)과 함께 간사로 선출되어 자금 모집과 적극적인 외교 지원을 요청하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홍보지 『선전(宣傳)』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세계의 열강을 대상으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선전에 힘썼다. 이 후원회는 태평양회의에 참여한 열강은 동양 평화의 근본문제인 대한 독립을 완전히 승인할 때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할 것과 내외 각 지방에 있는 각 단체 또는 개인은 모두 상호 협력하여 일치된 행동을 할 것,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대내외적으로 맹렬한 운동을 전개케 하며, 상당한 금전을 수합(收合)하여 경비에 충당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태평양회의에 대한 한국 독립의 청원서(太平洋會議에 對한 韓國 獨立의 請願書)」를 발표하고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상하이에 망명한 이후 상하이 한인들의 민족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직원과 교사로 활동하면서, 1919년 10월 15일 결성된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에도 관여하였다. 대한교육회는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를 정책적으로 양성할 필요성을 인식한 독립운동가들이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뿐만 아니라, 교육정책 자체를 연구하고 해외 유학생 수를 증가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였다.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강리 65호에서 회장 박은식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는데, 김정목(金鼎穆)·옥관빈(玉觀彬)·손정도·정인과(鄭仁果) 등과 서무부원(庶務部員)에 선임되었으며 그 외 편집부원 김두봉(金枓奉)·이광수·이한근(李漢根)·최창식(崔昌植) 등과 활동하였다. 인성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21년 교장으로 선임되어 민족교육 확대를 모색하던 중, 그 해 10월 23일 인성학교 유지금 모금행사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 주요 한국인 60명을 초대하고 인성학교 유지비 기부를 권유하여 30여 명으로부터 230여원의 청약계약을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콜레라에 걸려 1925년 10월 25일 이른 아침에 사망하였다. 1919년 12월 「왜적(倭敵)에게 대학살받은 간도동포구제(間島同胞救濟)」, 1921년 4월 「손의암선생(孫義菴先生)의 수진축하회(壽辰祝賀會)」, 「고(故) 동오(東吾) 안태국선생 추도식(安泰國先生追悼式)」 등 여러 추도식에서 빠짐없이 추도가를 특송하였다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기사가 남아 있다. 그 외 1921년 2월 17일 금수강산의 아름다움과 2천만 한국인의 용맹을 언급한 「반도가(半島歌)」란 노랫말과 1921년 3월 1일 3·1운동 2주기를 기리는 「삼월(三月)하루」란 장문의 시가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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