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世
昌世1893. 2. 22 ~ 1934. 3.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흥사단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적십자회 간호원양성소
- · 대한적십자총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1) 1893년 2월 22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서화면(瑞和面) 죽본리(竹本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을 하는 김승원(金承元)과 모친 하영생(河永生)의 5남 1녀 중 장남이다. 아명은 김오복(金五福)이다. 이신실(李信實)과의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이신실은 안창호(安昌浩)의 아내인 이혜련(李慧鍊)의 동생으로 안창호와 동서지간이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용강에 기독교 장로교파가 전래되고, 부친이 입교함에 따라 1900년 7살 때 평양 서문 안의 장로교 소학교를 다녔다. 1902년 성경을 인쇄할 활판을 구하기 위해 일본 고베(神戶)에 가는 부친과 동행해 고베중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이곳에서 제7안식일예수재림교회(이후 약칭 재림교회)로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돌아왔을 무렵 일본 재림교회 선교부 책임자인 필드(F. W. Field) 목사가 내한해 용강군과 강서군(江西郡) 지역 4곳에 재림교회를 설립했는데, 1년간 진남포(鎭南浦)의 재림교회 부설 소학교에 다녔다. 1905년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東京) 세이소쿠학교(正則學校)에서 2년간 수학하고 1907년 돌아와 서울의 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8년 재림교회 첫 의료선교사인 러셀(Riley Russell, 魯雪)의 조수 겸 통역으로 의료 활동을 도왔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 재림교회 미국 선교사 스미스(W. R. Smith)가 세운 순안의 의명학교(義明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3년 10월 재림교회의 지원을 받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입학해 1916년 3월 29일 졸업하였다. 이후 한국 재림교회가 운영하는 평양의 순안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 중국의 재림교회가 운영하는 상하이(上海)의 홍십자병원에서 의료연수를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국무총리 대리 겸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치의가 되었다. 1919년 7월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대한적십자총회(大韓赤十字總會)를 조직하고 사검(査檢)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십자대(十字隊)에 소속되어 적십자회원 모집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또 홍십자의원 의사로 근무하면서 일주일에 세 번 상해대한적십자회 간호원양성소에서 강의를 맡았고, 주당 18시간씩 3개월 과정의 속성과정을 주관하였다. 1919년 11월 임시정부의 평남 용강군 조사원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 2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원동서양선교회(遠東西洋宣敎會) 의원대회(醫院大會)에 상해홍십자병원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0년 5월 18일부터 1920년 11월 10일까지 임시정부 임시공채관리국 공채모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1월에 재림교 총회 극동 분과의 지원을 받고 미국 유학을 떠나 필라델피아의 제퍼슨 의과대학(Jefferson Medical College) 인턴과정에 등록하였다. 1923년부터는 존스 홉킨스 보건대학원(Johns Hopkins School of Hygiene and Public Health)에서 공중위생학을 연구하고, 1925년 1월 「녹두콩에 대한 화학적 생물학적 연구」로 공중보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유럽의 10여 개국의 위생 상태를 관찰하였으며, 독일 베를린대학의 세균학교실에서 몇 달 동안 연구하였다. 1925년 4월 귀국하여 10월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및 위생학 조교수로 부임해 위생학과 세균학을 강의하였다. 1927년 동우회(同友會) 의사부장(議事部長)으로 활동했으며, 그 해 8월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사직하고, 11월에 상하이 중화위생교육회 성시위생부(城市衛生部) 주임으로 취임하였다. 중화위생교육회에서는 위생선전과 위생교육을 담당하며 상하이지역의 공중위생 상태를 개선하는 데 기여하였다. 1929년 안창호와 동행해 필리핀을 방문하여 필리핀의 공중위생 행정을 시찰했으며, 폐결핵 환자의 요양 사업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30년 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국제의학회의에 참석하였다. 국제의학학회에서 「우유를 대체할 두유」라는 주제 발표를 하고, 결핵의 치료와 관리를 위한 요양 시설 설립 기금을 모금하였다. 1931년에 뉴욕시장의 주선으로 차이나타운에 진료실을 개설하였다. 1934년 1월에는 뉴욕 맨해튼 보이스카우트 보건과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거 때 붙잡힌 안창호의 석방을 위해 미주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 서재필(徐載弼) 등에게 협력을 구하고, 미국 정부 및 보라와 골드버그 상원의원, 기독교연방회의(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 등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 홀로 생활한 데다, 미국의 경제 불황이 덮쳐 각종 모금사업이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자 심한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인물들로부터 위협과 협박을 받았다고도 한다. 신경쇠약증이 깊어져 1934년 3월 15일 뉴욕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5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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