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호
金在浩1914. 9. 28 ~ 1976. 7.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 · 민족혁명당
- · 조선의용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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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914년 9월 28일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나주읍(羅州邑) 금성리(錦城里, 현 나주시 금성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호건(金胡建)이다. 해공 신익희(申翼熙)의 딸인 부인 신정완(申貞琬)과의 사이에 두 아들 김낙양(金洛陽)과 김유생(金渝生)을 두었다. 집안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조부 김창균(金蒼均)은 을미사변 직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아들 김석현(金晳鉉)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부친 김복현(金福鉉, 이명 김철(金鐵))은 1919년 전남 광주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부인 신정완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부부가 함께 전라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항일의식이 높은 집안에서 성장하여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의열단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의열단 간부학교, 곧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운영하였다. 1933년 전남 광주 출신 의열단원 정의은(鄭義恩)의 소개로 간부학교에 들어가, 1934년 4월 2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35년 7월 난징(南京)에서 좌우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체로 결성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참여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이 조선민족혁명당과 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으로 분열하자 김성숙·박건웅이 주도한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 또한 정의은의 권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를 주선한 정의은이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부은(鄭富恩, 일명 정율성(鄭律成))의 형이고, 또 정의은이 박건웅의 처남인 관계로 정의은의 권유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국군 제2전구(第2戰區)인 산시성(山西省) 일대에서 대적(對敵) 선무공작(宣撫工作)과 초모공작(招募工作) 등을 전개하였다. 1940년 경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의 대원으로 활동하였지만, 1941년 봄 조선의용대 주력이 뤄양(洛陽)에서 황하나루를 건너 화북으로 북상할 때 동참하지 않았다. 1942년 1월부터는 충칭시기 임시정부의 선전위원회 위원과 선전부 선전위원 겸 발행부 주임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임시의정원이 좌우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여 ‘통일의회’를 구성할 때,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대표하여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3년 3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사회과장으로 임명되었고, 1944년에는 총무과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 5월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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