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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炳大

炳大

1858 ~ 191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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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盧炳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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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尙州)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상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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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858년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화동면(化東面) 이소리(以所里)에서 아버지 노종구(盧宗九)와 어머니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포(錦圃), 이름은 처음 병직(炳稷)으로 쓰다가 병대(炳大)로 고쳤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아우 후재(厚齋) 노극신(盧克愼)의 14대 후손이다. 7세에 공부를 시작하였고 10세에 글을 지었다. 성장해서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부친이 사망한 3년 뒤, 1880년 25세 때 경북 의성군(義城郡) 문소리(聞韶里) 김원덕金(遠德)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금오랑(金吾郞) 윤모(尹某)를 비롯한 인사들과 뜻을 같이하고 군란에 관련되어 있는 관리들을 처단하려 했으나 비밀이 새어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89년 34세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모친이 사망하였다. 1895년 10월 향교를 없앤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성인(聖人)을 위해 죽겠다’며, 즉시 서울로 올라가서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며칠 동안 국왕의 답이 없자,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1898년 정월, 허전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던 허운(許運) 등 몇몇 사람들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 곡부(曲阜)에 이르러 공자(孔子)의 후손 연성공(衍聖公) 공령이(孔令貽)를 만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나주려 하지 않자 글로서 “공자 집안의 사람이 어찌 이렇게 예의가 없는가” 하고 나무랐다. 놀란 연성공은 사과하고 일행을 맞이하였다. 돌아올 무렵 조정(朝廷)과 태학(太學)에 글을 보내 다시 한 번 향교 폐지를 막아보려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판서(判書)를 지낸 이용원李(容元)을 만나 “지금 나라일이 그릇되었으니 만약 비밀 조칙(詔勅)이라도 얻는다면 의병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용원이 상소하여 “전 참봉 창의 신(倡義臣) 노병대를 선조(宣祖) 계사년(癸巳年)의 예에 따라 분충정난(奮忠靖亂) 2등(二等)을 내리고 별도로 비서원 비서승(秘書院秘書丞)에 특별히 임명하노라”는 내용의 비밀 조칙을 받았다고 한다. 바로 그날 고향으로 돌아와 몇몇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후 경기 광주군(廣州郡) 임용헌(林容憲), 충남 연산군(連山郡)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 등과 함께 나라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7년 7월 13일, 모여든 군사 200여 명을 이끌고 속리산(俗離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어서 서울과 청주(淸州)에서 해산당한 군인들이 계속 모여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병 수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 의병들은 김운로를 맹주로 추대하고, 먼저 보은(報恩) 관청을 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처단하였다. 이어서 경북 상주 청계사(淸溪寺)로 부대를 옮겼으나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청주(淸州) 미원(米院)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치열하게 전투를 펼쳐 일본군 5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사방이 포위되고 적병의 공격이 계속되자 하는 수 없이 부대를 나누어서 물러났다. 부대를 이끌고 호남지방을 거쳐 경북 성주(星州)로 이동하여 전투를 계속 펼쳤다. 여기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의병들도 부상자가 많았다. 경남 거창(居昌)에 이르러서도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노병대 의병부대는 이후 충북 보은·청주, 경북 성주, 경남 안의(安義)·거창, 전북 무주(茂州)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거창 우두령(牛頭嶺)에 이르러서 크게 패하고 속리산으로 이동하였다. 이 때 남은 군사는 겨우 50명에 불과하였다. 1908년 6월 15일, 보은군 관기면(官基面)의 관주점(冠酒店)에서 보은군 주재소순사와 청주수비대 소속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 수비대 분대장이 심문하였으나, 심문에 굴복하지 않자 급히 공주재판소로 보내졌다. 공주재판소에서는 한쪽 눈을 뽑히는 수난까지 당하였다. 단식으로 자결을 하려했으나 감시자들이 강제로 음식을 먹이면서 실패하였다. 1908년 9월 14일, 이른바 폭도내란죄로 10년 유형을 받고 옥에 갇혔다. 일본군은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의 본 집과 재실(齋室)까지 모두 불태웠다.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특사 구실로 내보내려 하자, “너희들에게 경사가 있다고 어찌 나를 내보내는가”하고 거부하였으나 강제로 풀려났다. 의병을 다시 일으키고자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1911년 4월경 경북 풍기(豊基)에서 활동하였고, 7월에는 경북 함창(咸昌)의 한익원(韓翊源)과 함께 상주읍 공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 12월에는 구동식(具東植)·손일현(孫日鉉)·강봉주(姜鳳周) 등과 함께 경북 선산(善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12년 11월, 경북 비안군(比安郡) 모창동(毛昌洞) 뒤 어느 마을 최덕로(崔德老)의 집에서 부하 강봉주(姜鳳周)·손요득(孫了得)과 함께 안동군 풍남편(豊南面) 하회동(河回洞)의 참봉 류시일柳(時一)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여, 1912년 같은 해 11월 18일, 강봉주·손요득·안병모(安炳謀)·허찬(許璨) 등이 류참봉의 집에 들어가 돈 558원과 잡품 21점을 거두어 들였다.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1913년 4월 18일 일본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앞의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2년이 더 늘어나 12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3년 7월 10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되었다. 대구감옥에서 “내 나이 50이 넘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하며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음식을 끊은 지 28일 만에 피를 토하고 1913년 8월 11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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