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붕
金在鵬185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동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광무황제 강제퇴위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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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9) 자료에 따르면 1853년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선전관을 거쳐 1886년 7월 구례현감, 1889년 1월 단천부사, 1889년 12월 만포첨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2년 부호군, 1897년 순천군수에 임명되었다. 1907년 6월 홍재칠(洪在七)과 일본인 다카하시 히사시(高橋久司) 등이 한일 양국의 국조 숭경(國祖崇敬), 양국민의 정신적 화목, 그리고 교육·자선·식산(殖産) 발달을 목적으로 창립한 동우회(同友會)에 가입하였다. 다카하시 히사시는 재조선 일본인으로서 1906년 시조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제사지내는 신궁을 건설하기 위해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를 조직한 인물이다. 동우회는 1907년 7월 초부터 헤이그특사파견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광무황제를 추궁하고, 송병준(宋秉畯)·이완용(李完用) 등이 광무황제(고종) 양위를 주장하자 이전과 다른 활동을 시작하였다. 광무황제가 7월 16일 이완용의 헤이그특사 파견과 관련하여 일왕에 대한 사과와 양위 요청 등을 모두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이완용·송병준 등이 거듭 각료 어전회의에서 광무황제 양위를 주장하였다. 이날 일본 외무대신이 서울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동우회는 서울 중서(中署) 중곡(中谷) 사무소에서 특별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하여 윤이병(尹履炳)의 광무황제 일본행을 막아야 한다는 연설을 들었고, 회원들과 함께 이완용·송병준 등을 국적(國賊)이라 규탄하고 다음날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7월 18일 군중시위를 반대한 이윤용(李允用)과 이범규(李範圭)가 회장단에서 사임하자, 새롭게 윤이병이 회장에 선출되었는데 이때 부회장이 되었다. 조직을 개편한 동우회는 ‘황실 존중’, ‘청년 교육’, ‘동양 평화’ 등으로 목표를 수정하였다. 특별회의에서는 광무황제에게 관련 대신들의 주살(誅殺)을 상소하고 민중과 함께 저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광무황제에게 올릴 상소를 준비하고자 종로의 포전도가(布廛都家)에 임시사무소를 마련하고 ‘만민공동회만인소청(萬民共同會萬人疏廳)’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그 후 동우회는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윤이병이 종로의 군중들에게 경운궁 대한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광무황제가 일본행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울역으로 달려가 이를 저지하자고 연설하였다. 그 뒤 동우회 회원들을 이끌고 대한자강회·기독교청년회 회원 등과 함께 대한문과 포덕문(布德門) 앞에서 광무황제 양위 반대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시위 군중들은 이를 제지하던 경관들과 투석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날 시위는 다음날인 7월 19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7월 19일 황태자로 하여금 정사(政事)를 ‘대리’하게 하는 광무황제의 조칙이 내려지자, 다시 사무소에서 회의를 열어 국권 수호를 위한 결의를 다지고, 이튿날 경운궁 대한문 맞은편에 있는 황궁우 옆의 석고단(石鼓壇)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7월 20일 아침부터 동우회원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 수천 명이 석고단에 모여들었다. 회장 윤이병이 단상에 올라 광무황제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막자며 서울역과 서대문역을 소각하고 철도를 파괴하자는 연설을 하였고, 이어 다른 회원이 등단하여 매국 대신들이 입궐하여 직접 죽일 수는 없지만 총리 이완용의 집을 방화하자며 연설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강태현(姜泰鉉)·송영근(宋榮根) 등과 함께 국민결사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이끌고 서소문 밖 약현(藥峴)으로 몰려가 이완용의 집을 불살랐다. 이때 일진회 기관지를 발행하던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도 공격하였다. 하지만 그 날 경운궁에서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하례식이 거행되었다. 1907년 7월 21일 상황이 더욱 과격해지는 것에 당황한 일본군 사령부는 회장 윤이병에게 대중 집회 금지를 명하였고, 7월 25일 경시청(警視廳)에서 동우회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였다. 7월 28일 회원 20여 명과 함께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다. 8월경 윤이병 외 19명과 함께 감옥서로 이송되었다가 12월 29일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아 유형(流刑) 10년에 처해졌다. 1908년 1월 16일 전라남도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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