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俊澤
俊澤1889. 10. 13 ~ 1935. 10. 2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
- · 정의부(正義府)
- · 국민부(國民府)
- ·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싱징사건(興京事件)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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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1889년 10월 13일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은산면(殷山面) 진산리(鎭山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보안(普安)이다. 이명으로는 김보안(金輔安)·(金保安)·김관융(金官戎)·(金冠戎)·(金寬戎)·김관웅(金寬雄)을 썼다. 1915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1921년 8월 8일 태극단(太極團)·대진단(大震團)·흥업단지단(興業團支團)·광복단지단(光復團支團) 등 단체 대표들이 통합회의를 열고, 1922년 3월 1일 창바이현(長白縣)에서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조직하였다. 대한국민단에 참가하여 이재연(李在然)·강인구(姜寅求) 등과 함께 문화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찾고자 개최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남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가들은 독립군세력을 결집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4년 3월 하순 전만통일회주비회(全滿統一會籌備會)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여러 차례 전만통일회주비회 회의를 거쳐 1924년 11월 24일 대한광정단(大韓匡正團)·의성단(義成團)·지린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 등 8개 단체가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다. 정의부 창립총회에 민선대표(民選代表)로 참가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정의부 임시행정집행위원, 학무부 편집과(編輯課) 주임위원으로, 1926년 1월에는 정의부 중앙행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10월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외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 3월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대표들이 3부 통합을 위해 지린(吉林)에서 민족유일당조직동맹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거쳐 4월 1일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그 해 5월 28일에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에서 외무부 담임위원에 임명되었다. 9월 27일에는 국민부 제2회 중앙의회에서 교육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1월 24일 싱징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설립된 국민부립사범학교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각 지방기관 위원장에게 통지문을 보냈다. 1929년 11월 15일부터 개최된 조선혁명당 창립총회에 이호원(李浩源)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조선혁명당 창당과 함께 중앙집행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자치위원회 위원, 교양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8월 8일 싱징현 왕청문 남만학원(南滿學院)에서 개최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7월 5일 싱징현에서 판스현(盤石縣)으로 이동하여 국민부 지방조직을 설치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현익철(玄益哲)이 일제에 붙잡히자 8월부터 그의 뒤를 이어 조선혁명당 군사부위원장,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1932년 1월 20일 싱징현 하북(河北) 서명세(徐世明)의 집에서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이종건(李鍾乾), 조선혁명군 부사령 장세용(張世湧), 조선혁명군 독립대장 이규성(李奎星),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장 이호원, 조선혁명군 제2중대장 전운학(田雲鶴) 외 19명과 함께 퉁화일본영사관경찰(通化日本領事館警察)에게 붙잡혔다. 이를 ‘싱징사건(興京事件)’이라고 한다. 1932년 4월 19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6월 21일까지 조사를 받은 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32년 11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1935년 10월 22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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