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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鐸

昌鐸

1881. 10. 21 ~ 1960.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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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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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마산(馬山)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마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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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8)

관련 사건

  • · 제1차 유림단사건(파리장서운동)
  • · 제1차 유림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8) 1881년 10월 21일 경상남도 마산부(馬山府) 원정(元町,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일대) 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창택(金昌澤)·김창권(金昌權)을 사용하였다. 유림들과 함께 활동한 이력으로 보아, 한학에 밝았던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 따르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김창숙(金昌淑)이 주도한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에 참가하였다. 국망(國亡)의 원인에는 유교(儒敎)가 망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김창숙은 유림(儒林)들이 독립서명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통탄해 하며, 유림들이 앞장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중업(李中業)·유진태(劉鎭泰) 등과 함께 전국에 있는 유림 134명의 서명을 받은 후 이를 가지고 중국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에 김우식(金愚植)·윤중수(尹中洙)와 함께 김창숙의 송별연을 열어 유림들의 독립에 대한 호소가 열강에 전달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이 송별연을 주관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들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1925년 8월 중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고자 김창숙이 국내로 잠입하였다. 김창숙은 8월초부터 1926년 2월까지 전국 인사들을 대상으로 모집한 독립운동 자금 4~5,000원을 가지고 국외로 망명하려 하였다. 김창숙이 독립운동자금 전부를 가지고 가다가 체포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자, 손후익(孫厚翼)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운반 방안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그리고 1926년 3월 상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김창숙이 모집한 독립운동 자금 가운데 3,550원을 중국까지 운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같은 해 3월 26일 중국 봉천(奉天)(현 심양)까지 자신이 가지고 간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하였다. 이 일로 경상북도 경찰국(警察局)에 붙잡혔다.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예심 결과 재판에 넘겨졌다. 같은 해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미결구류일수 100일 본형 산입)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지만, 1년이 넘게 옥고를 치른 후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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