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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彦

昌彦

1893 ~ 1930.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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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昌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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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1930년 7월 단천 삼림조합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2) 정확한 출생 일자는 알 수 없지만, 1930년 당시 38세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1893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지 또한 사망 당시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다면(何多面) 쌍상리(雙上里)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 단천 출신으로 보인다. 1930년 7월 18~29일 삼림조합 반대투쟁과 군민들의 처우개선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삼림조합은 산림보호와 개발을 빌미로 민중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임산물의 채취를 금지하고자 만든 관제 조직이었다. 대부분 군 단위로 조직된 삼림조합은 관련 규정을 제정하여 군민들의 숯과 땔감 생산을 금지하였다. 단천군에서는 1929년 3월부터 삼림조합 결성을 추진하였는데, 군민들이 생존권 박탈에 항의하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음에도 1930년 5월에 조합 결성을 강행하였다. 삼림조합 설립 후 조합 간수(看守)들이 단천군민들에 대한 임산물 채취 단속을 강력하게 집행하면서 그 제재가 도를 넘자 군민들의 불만도 고조되어 갔다. 1930년 7월 단천군 하다면 삼림조합 간수 양성환(梁成煥)이 연대리(蓮坮里) 주민 허달규(許達奎)를 도벌(盜伐) 혐의로 취조하려다 허달규가 집에 없자 부인을 폭행하고 구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개한 연대리 주민들은 조합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투쟁을 위해 단천군 농민운동 지도자들과 공동 투쟁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1930년 7월 18일부터 20일에 걸쳐 단천군 삼림조합 반대 군민투쟁이 일어나자 이 투쟁에 적극 동참하였다. 7월 18일 단천군 하다면 면민 200여 명은 면사무소와 단천군청으로 몰려가 삼림조합이 자행한 부당행위의 척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일제 경찰이 조속한 처리를 약속하자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지만, 오히려 다음 날 시위를 주도한 5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해산 이후 당국의 조치를 기대하던 면민들은 시위대의 검거 소식을 듣자 7월 19일 곧바로 400여 명이 집합하여 단천군청에서 연좌시위로 항거하면서 삼림조합 반대 및 군수 면담 등을 요청하였다. 면민들의 투쟁은 면 단위의 시위를 넘어 군민들의 삼림조합 반대투쟁으로 진전되어 단천군 내 8개 면의 군민대회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7월 20일 단천군 하다면, 파도면(波道面)·복귀면(福貴面)에서 약 2,000여 명의 주민들이 군민대회에 가담하였다. 군민대회의 대표자는 군수 임창재(任昶宰)에게 관제 삼림조합 해산과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군수가 요구에 응하지 않자 군민들이 격분하여 군청 유리창을 깨뜨리며 군수와의 면담을 요구하였으며, 시위대 일부는 경찰서로 이동하여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경찰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 30여 명이 무기도 없는 시위대를 향해 공포탄과 실탄을 발포하면서 강제 해산을 위한 유혈진압을 벌였다. 이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여 일제 경찰도 1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나 시위대 또한 피해자가 속출하였다. 연대리 최두필(崔斗弼)·장종형(張宗亨), 복귀면 두언태리(豆彦台里) 김계환(金啓煥) 외 1인 총 4명이 총을 맞아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30여 명 이상이 심각한 총상을 입었으며, 그 가운데 10여 명은 며칠 후 사망하였다. 이때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고, 결국 1930년 7월 21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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