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彬
昌彬1891. 8. 6 ~ 1983. 8.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6)
관련 사건
- · 평양 만세운동
- · 의용단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6) 1891년 8월 6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길림면(吉林面) 내리(內里)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흥사단 이력서에는 출생연도가 189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활동 당시의 본적은 평안남도 대동군 추을미면(秋乙美面) 이천리((梨川里), 현 평양시로 편입)였으며, 주소지는 일정하지 않았다. 이명(異名)은 김춘하(金春河)·김임겸(金林兼)을 사용하였다. 원래 김춘하였는데 이후 김창빈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1909년 대동군 칠리(七里)에 있는 사립 창원소학교(彰源小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농사를 짓다가, 1915년부터 1919년까지 평양(平壤)에 있는 장로회 계통의 신우소학교(信友小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평양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조직에서 평양교통국장(平壤交通局長)으로 활동하였다. 더불어 서울의 결의단(結宜團)과 평양의 의용단(義勇團) 등 비밀결사에도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곽권응(郭權膺) 등 기독교 장로교 계통의 인사들이 평양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평양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고, 보다 많은 대중을 참가시키기 위해 평양의 6개 장로파 교회와 연합하였다. 그리고 광무황제(고종)의 봉도식(奉悼式)이 거행되는 관후리(館後里)의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고, 독립선언서는 서울에서 인쇄된 것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숭덕학교에서 고종의 봉도식이 끝난 뒤 김선두(金善斗)의 사회로 독립선언식이 전개되었다. 정일선(丁一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강규찬(姜奎燦)이 독립정신에 관하여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이 식이 끝난 직후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는 일을 맡았는데, 당일 운집한 1,000여 명의 군중에게 수백 개의 태극기를 배포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임시정부의 연통제 조직에서 평안남도 평양교통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서 『독립신문』 등의 제작비를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김석황(金錫璜)에게 신임장(信任狀)을 교부받고 자금 모집에 나섰다. 동시에 1919년 11월 이래 서울에 이원식(李元植)을 국장으로 하여 임시정부 교통사무국(交通事務局)을 설치하고 임시정부의 공채(公債) 모집 활동에 종사하던 비밀결사 결의단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 초순경 서울에서 임시정부 특파원 오학수(吳學洙)를 중심으로 경성교통국(京城交通局) 참사(參事)로 임명된 이기하(李起夏)·정의도(丁義道)·김청풍(金淸風), 황해도 교통국장(黃海道交通局長) 손재흥(孫再興)을 비롯해 김재덕(金在德)·신학렬(申學烈)·김원흠(金元欽) 등과 만나 『독립신문』과 각종 문서를 황해도 이북 지역에 배포하였다. 또한 신학렬·김원흠·김재덕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부터 안동현(安東縣)을 경유하여 각종 문서를 국내로 반입하여, 그 가운데 일부를 황해도 교통국장 손재흥에게 송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 6월 초순 평양의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김석황의 지휘 아래 홍석운(洪錫雲)·주석환(朱錫煥)·표영준(表永準)·유영삼(劉英三)·여행렬(呂行烈) 등이 조직한 의용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의용단은 군자금 모집, 일제 중요기관 파괴, 요인 주살(誅殺) 등을 목적으로 한 조직이었는데, 그 산하 평안남도지단(平安南道支團)의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의용단은 1920년 1월 상하이에서 손정도(孫貞道)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의용단(大韓獨立義勇團)이 국내에 지단(支團)과 분단(分團)을 설치한다는 방침에 따라 평양을 중심으로 조직된 결사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국내로 파견된 대한독립의용단 총무 김석황이 평양의 김동선(金東宣)을 만나 국내 의용단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평양을 중심으로 위와 같이 의용단이 조직된 것이며, 이후 수안(遂安)·강동(江東)·중화(中和)·덕천(德川)·순천(順川)·평원(平原)·서울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의용단 조직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920년 8월 총무 김석황을 비롯하여 등 다수가 붙잡히자, 경찰의 눈을 피하여 같은 해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미국 조계지(租界地)인 장빈로(長浜路)에 거주하면서 삼육대학(三育大學)을 다녔다. 이후 안창호(安昌浩)의 소개로 1922년 3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하면서 1924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김춘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흥사단 심사부(審査部)에서 활동했으며, 1940년대에는 심사부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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