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百
昌百1879. 12. 27 ~ 1942. 10.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제1차
- · 제2차 유림단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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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9년 12월 27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옥성동(玉星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경능(敬能)이며, 이명은 김해남(金海南)이다. 활동 당시 본적은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내성면(乃城面) 해저리(海底里, 일명 바래미골)였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의 사촌동생으로서 종형제(從兄第) 사이이다. 1908년 김창숙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부(星州支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운동(제1차 유림단 사건)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김창숙 등이 중심이 된 국내 군자금 모집활동에 참여하여, 일명 ‘제2차 유림단(儒林團)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만세운동과 파리장서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김창숙은 1925년 1월에 동지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함께 영남(嶺南) 지방의 부호(富戶)들을 대상으로 20만 원의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이 군자금 모집에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3월부터 7월까지 협의한 결과, 모집한 군자금으로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未墾地)와 황무지(荒蕪地) 20만 정보(町步)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을 계획하였다. 만주지역의 한인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즉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 달성을 준비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 이러한 계획 아래 김창숙은 1925년 8월 25일 서울로 들어왔으며, 이보다 조금 앞서 송영호·김화식 등도 국내로 들어왔다. 같은 해 9월 중순경 대구(大邱) 권용택(權龍澤)의 집인 소근약국(少槿藥局)에서 김창숙의 매부인 이길호(李吉浩)로부터 600원을 받아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은신하고 있던 김창숙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그 자리에서 김창숙으로부터 유학자 곽종석의 문집 출판을 계기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는 계획에 대해 상세히 듣고,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다. 다음날 이길호를 만나 김창숙이 국내에 들어온 목적을 전달하고, 그의 집에 며칠 머무르면서 독립운동자금 1,400원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이 자금을 모두 김창숙에게 전달하지 않고 일부를 횡령했다 하여, 후일 법정에서 횡령죄(橫領罪)가 추가되었다. 1925년 11월 3일 봉화군 내성면 해저리 자택에서 김창숙의 지시로 봉화에 온 경주(慶州) 출신 정수기(鄭守基)와 함께 봉화 일대의 부호(富戶) 김뢰식(金賚植)·권상경(權相經)·강필(姜泌) 등을 찾아가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후 몇 차례 정수기를 김뢰식과 그의 아들 김창희(金昌禧)와 만나게 함으로써 자금 모집을 도왔으며, 서울로 올라가 진행 상황을 김창숙에게 보고하였다. 1926년 1월 대구 권용택의 집에서 고령(高靈)의 이영로(李泳魯)에게 김창숙의 취지를 설명하여, 이영로도 독립운동자금 모집원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영로에게 김창숙으로부터 받은, 밀양(密陽)의 부호 허석(許鉐) 앞으로 된 출금요구서를 전달하였다. 이로써 이영로는 허석으로부터 100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정수기, 영주(榮州)의 송영우(宋永祐) 등과 함께 경상도 일대의 명망 있는 한학자인 김동진(金東鎭)의 장남 김제직(金濟稷)을 만나 김동진을 동지로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3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에서 김창숙·정수기와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응하지 않는 부호들을 압박하기 위해 중국에서 의열단(義烈團) 단원을 초빙하여 폭탄을 사용하려는 계획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6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총포화약류단속령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이때는 불기소로 풀려났다. 이후 1928년 12월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9년 9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횡령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1년 9월 30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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