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宗錫
宗錫1898. 2. 6 ~ 1969. 10.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성천청년회
- · 대한국민회 성천지회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6)
관련 사건
- · 성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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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6) 1898년 2월 6일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영천면(靈泉面) 노동리(蘆洞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윤석(金潤錫)이라고도 한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지역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다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2일 일반인 대표로 김용식(金庸植)·이춘삼(李春三)·황난목(黃暖穆)과 함께 천도교 대표 김봉국(金鳳國)·최우겸(崔祐謙)·박관호(朴寬浩)·이선범(李善範) 등을 만나 성천군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4일 성천군의 천도교인과 일반시민 등 약 2,000명이 모이자, 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미리 준비하였던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시위행진에 나섰다. 시위대의 목표는 성천헌병분대(成川憲兵分隊)로 정하였다. 그러자 헌병대에서 1개 중대를 파견하여 시가 경계를 하면서 통행을 금지하였고, 시위대는 오후 6시경 해산하였다. 이 성천만세운동으로 가택을 수색당한 후 성천경찰서에 붙잡혀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1919년 8월 이성윤(李成允) 등과 함께 대한독립 의견서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회람하게 한 뒤 독립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하기로 결의하고 비밀단체를 조직하였다. 단체명은 성천청년회라 칭하였다. 이후 국내 각지에서 활동하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접촉하여 성천청년회를 대한국민회 성천지회로 고쳤다. 대한국민회의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의연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고, 『독립신문』과 경고문 등을 인쇄하여 주요 지역에 배부하였다. 이 일로 1920년 6월 다시 붙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6월 만주로 간 뒤 1924년 창춘(長春)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붙잡혀 2주간 구류당하였다. 1925년 8월 귀국하였으나, 성천에서 붙잡혀 21일간 감금되었다가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1930년 10월에는 충청북도 보은에 갔다가 그곳 경찰서에 연행되어 21일간 구류당하는 등 요시찰인물로 계속 감시를 받았다. 1939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신문판매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는 평양과 선천군의 광산에서 감독으로 일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에 거주하다, 1948년 5월 월남한 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성천군민회장과 고문직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송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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