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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金仁植

1911. 12. 27 ~ 1975.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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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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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麗水)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여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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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여수사회과학연구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8) 1911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여수 중류(中流)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전남 여수군 돌산면(突山面) 죽포리(竹浦里)이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벌교군 벌교읍 벌교리에 살았다. 김군식(金君植)이라는 이명과 금택인식(金澤仁植)이라는 창씨명을 사용했다. 1928년 3월 여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1930년 3월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4월부터 여수의 사립 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12월에는 사직하고 농업에 종사했다. 이 시기 여수에서는 식민지 교육 반대 시위를 전개한 여수수산학교 학생들과 여수보통학교 출신들이 함께 항일조직인 독서회를 바탕으로 반일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즉 1929년 8월 상순 여도현(呂道鉉)·김용운(金龍云)·김양식(金良植)·김용환(金龍煥)·여운종(呂運鍾)·장평완(張平完) 등이 유산자와 무산자의 모순과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독서회를 조직했으며, 이를 통해 회원 스스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일반 대중에게 신사상을 선전하여 계급의식을 함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도현, 김용환, 여운종 등은 1930년 2월 1~2일에 걸쳐 붙잡혔고 뒤이어 일제 경찰로부터 고려공산당 계통으로 지목 받은 김영균(金永均)이 독서회를 인계하여 지도하였다. 이러한 영향 아래 장평완과 최준문(崔俊文) 등의 직접 지도를 받아 팜플렛과 잡지 등을 읽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나아가 1930년 3월부터 김영균의 권유로 여수 지역 독서회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독서회는 1930년 6월 이후 김영균이 손을 뗀 상태에서 장평완이 주도해 같은 해 8월 여수읍 봉산리 의암산(義岩山)에서 여수사회과학연구회(麗水社會科學硏究會)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오우홍(吳宇鴻)·박희봉(朴熙奉), (朴炳林)·이상도(李相道),·김용운·김양식 등과 함께 연구회에 참석하였다. 여수사회과학연구회는 의암산 등에서 수 차례에 걸쳐 사회주의 이론 연구와 조직 확대에 대해 토의를 전개했으며, 또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1930년 11월 7일 러시아혁명 기념일에는 장평완의 집에 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1932년 7월에는 여수적색노동조합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여수적색노동조합은 지역 내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과학 연구에 치중하던 도중에 세계대공황기 이후 노동자·농민의 대중투쟁 확산에 초점을 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아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1931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이창수(李昌洙)가 주동이 되었으며, 회원들이 노동복을 입고서 노동시장에 나가 주의를 선전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동시에 고무공장과 여수항 운수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하였다. 1932년 10월 무렵에는 이창수와 장평완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장평완이 탈퇴하자, 표면상 결사를 해체하고 지하운동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1933년 8월 반전데이에 즈음하여 모종의 운동이 진행 중이라는 첩보를 바탕으로 7월부터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과와 여수경찰서의 합동 수사에 의해 관련자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후 7개월 동안 약 80여 명이 붙잡혀 조사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붙잡혀 1934년 1월 29일,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첫 공판은 1936년 5월 20일경에 열렸으며, 1936년 6월 2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 300일 통산)을 받고 풀려났다. 출옥 이후 사회주의운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일본 후쿠오카로 건너가 대외 정세를 살피고 귀국하기도 하였다. 또한 벌교로 주거지를 옮겨 일본과 교차 무역을 시작하여 상당한 재력가가 되었고 제재소(製材所) 등 사업체를 경영했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 종로구 충신동으로 주소를 옮겨 사업 활동을 하다가 1951년 1·4후퇴 때 가족을 데리고 여수로 피란을 가던 중 사업체를 살피러 벌교에 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전한다. 1975년 3월 28일 가족들의 뜻에 따라 제적 처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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