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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

金昌鉉

1889. 2. 17 ~ 1944.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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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창현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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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주(海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해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구월산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해주3
  • · 1독립운동 선언식 주도
  • · 친일 황해도 은율군수 처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9년 2월 17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해주읍 구재동(九齋洞)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를 믿었다. 그 밖에 성장 과정은 자료의 한계로 정확히 알기 어렵다. 1919년 해주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주도하였다. 해주는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3월 1일 독립선언식이 있기 이전에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실행한 지역이었다. 1919년 2월 20일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희도(朴熙道)와 서울 만세운동을 준비한 최성모(崔聖模)의 지시를 받은 김명신(金明信)이 300장의 독립선언서와 편지를 가지고 해주로 왔다. 이에 해주 남본동(南本洞)교회 목사인 오현경(吳玄卿)을 만나 이를 전해주었고, 오현경은 그 날 밤 즉시, 뜻을 같이한 동지들을 남행동(南幸洞)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았다. 전달을 받고 황학소(黃鶴巢)·임용하(林容夏)·이동혁(李東赫)·최명현(崔明鉉) 등과 오현경의 집으로 갔다. 이들은 밤을 세워가며 3월 1일 해주에서의 독립선언식 선포와 향후 일정을 논의한 후 헤어졌다. 해주의 만세운동은 지방이면서도 이미 8일전부터 그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3월 1일 오후 2시, 기독교인 170여 명이 모인 남본동교회에서 오현경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만세’ 삼창이 있은 후, 모인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남은 독립선언서를 오현경에게 건네받아 사전에 약속하였던 지역에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간파한 해주경찰서는 주도 인물들을 검거하기 위해 대병력을 동원해 해주읍 전체에 탄압을 가하였다. 결국 오현경과 준비단계에서부터 참여하였던 주도 인물 모두가 붙잡히고 말았다. 황해도지역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이 일로 박용하·이동혁·최명현 등과 함께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8월을 받았으나, 상고해 징역 1년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했을 당시 해주에는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지단(支團)이 설치되어 있었다. 1919년 11월 대한독립단 사한장(司翰長)인 김기한(金起漢)이 해주로 들어와 지단을 설립하고, 정순경(鄭順敬)이라는 인물을 도통신(都通信)에 임명하였다. 김기한이 서간도 본부로 돌아간 뒤 정순경은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출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원이 되었다. 1920년 중반 대한독립단 본부에서 국내진입 유격대가 파견되어 황해도로 왔다. 대장은 이명서(李明瑞)였고, 고두환(高斗煥)·민양기(閔良基)·박중서(朴重緖)·박기수(朴基洙)·주의환(朱義煥)·이지표(李芝杓)·원사현(元士賢)·이근영(李根永) 등 총 9명으로 구성된 유격대였다. 유격대의 파견 목적은 독립운동 자금 모집도 있었지만, 군민들을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친일 은율군수(殷栗郡守) 최병혁(崔炳赫)과 일파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음)7월 중순 유격대 대원들이 해주로 오자 이성룡(李成龍)·문응선(文應善)·박성행(朴聲行)·최명현(崔明鉉)·차기순(車基淳) 등 단원들과 이들을 지원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능력이 되는대로 자금을 모아 유격대의 필요 경비로 사용하고, 각자의 자택을 숙식처로 제공하기로 하는 등 지원 방안을 합의하고 각각 임무를 정한 뒤 해산하였다. 단원들을 만나 자신들의 활동 계획을 설명하고, 그들에게서 지원 방안을 들은 유격대는 우선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 근거지를 구축하였다. 구월산의 산자락에 비교적 많은 단원들이 거주했기에 통신도 수월하고, 이동하는데 원활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격대는 우선 이번 작전의 가장 큰 목표물인 최병혁을 처단하기 위해 8월 15일 은율읍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대원들을 4개조로 나누어 최병혁과 군참사(郡參事) 고학윤(高學倫)의 집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최병혁은 유격대에게 처단되었지만, 고학윤은 기미를 알아채고 도망가 실패하고 말았다. 작전을 끝낸 유격대는 은율군을 벗어나 신천(信川)·송화(松禾)·해주 등에 있는 단원들의 집을 옮겨가며 일제의 추격을 피하였다. 그리고 9월 초에는 근거지인 구월산으로 가 산록에 위치한 단원 노성우(盧聖祐)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자신들에게 협조적이던 친일군수가 살해된 사실 때문에 대병력을 동원해 유격대를 끈질기게 추적하였다. 유격대가 노성우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탐지한 일본 경찰대는 9월 10일, 80명이 넘는 경찰대로 유격대를 공격하였다. 유격대는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기습을 당한데다가 중과부적이어서 결국 대장 이명서를 비롯해 주의환·이지표·원사현 등 6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붙잡혔다. 이들 유격대의 명칭을 구월산대라 부르며, 대원들이 사망하고 검거되면서 이를 지원하였던 30명의 단원들과 함께 붙잡혔다. 해주지방법원에 이어 평양복심법원에서 1921년 11월 30일 최명현·박성행·이성룡 등과 함께 징역 3년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44년 6월 15일 사망할 때까지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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