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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주

金漢洲

1876. 9. 11 ~ 196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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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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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沃川)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옥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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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옥천군 청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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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76년 9월 11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청산면(靑山面) 인정리(仁政里)에서 태어났다.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고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밝아 인근의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던 인물로, 1919년 4월 2일~4일까지 청산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청산면에서는 이미 3월 26일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전개한 만세시위가 있었고, 이 직후에는 청산소학교(靑山小學校) 청산공립보통학교(靑山公立普通學校, 현 청산초등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계획이 한국인 교사 성기호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이 때문에 일제는 이 지역의 만세시위를 경계하기 위해 헌병수비대 20여 명을 청산주재소(靑山駐在所)에 배치하고, 공포탄을 쏘면서 낮부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청산면은 옥천군으로 폐합되기 전 청산군의 군소재지였고, 청산시장은 보은군(報恩郡)·영동군(永同郡) 등에서도 장꾼들이 모이는 규모가 큰 장터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과 함께 청산시장 장날인 4월 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1919년 4월 2일 저녁 백운리(白雲里)·교평리(校平里)·지전리(芝田里) 등의 인근 마을 주민 500여 명을 교평리의 입구인 가죽나무재에 소집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죽어도 내가 먼저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내 뒤를 따르라”하고, 광목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가 있는 지전리로 향하도록 지휘하였다. 시위대가 지전리의 만리방천(萬里防川) 둑을 지나 청산장터로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인근 10리 내외의 7~8개 마을 청년들이 만세소리를 듣고 속속 합류하였다. 청산시장에 도착하자, 청성면(靑城面), 보은군의 마로면(馬老面)·삼승면(三升面)과 영동군의 용산면(龍山面) 등에서 시장에 나온 장꾼들까지 합세하면서 시위대 규모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일제 헌병들은 해산을 명령하면서 청산면에 거주하던 5~6호의 일본인들을 청산주재소로 피신시켰다. 해산을 강요하는 일제 헌병에 대항하여 시위대를 청산주재소로 행진하게 하여 격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4월 3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철수(金轍洙)·김인수(金仁洙) 등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여러 명 여러 명 발생하였으며 고한주(高漢周) 등이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하여 4월 4일 밤 다시 주민들을 소집하자, 3,0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모였다. 이들을 지휘하여 주재소를 습격하고 불태웠다. 일제 헌병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만세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였다. 이때 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날 만세시위를 주도한 일로 일제 헌병에 붙잡혀 옥천경찰서에 갇혔다.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점이 인정되어 법원에 송치되었다. 1919년 4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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