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미상 ~ 미상
관련 단체
- · 시사책진회
- · 상해청년동맹회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의열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차병수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출생시기를 알 수 없다. 충청남도 아산(牙山), 또는 평안남도 평양(平壤)이라는 설이 있는데, 중국 망명 이후의 독립운동 내용과 동지들과의 관계, 행정 등으로 미루어 충남 아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911년 이른바 ‘차병수(車炳修, 1873~1928) 사건’에 얽혀 서간도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차병수는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신으로 1910년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고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13년 2월 21일 최남화(崔南華)·이원찬(李元贊) 등과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 상하이[上海]로 갔다. 1922년 7월 상하이에서 시사책진회에 참가하였다. 시사책진회는 1922년 7월 13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35명이 모여 결성한 것으로, 임시정부의 개편과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데 목표를 둔 조직이었다. 안창호(安昌浩)가 회장을 맡고, 여운형(呂運亨)·신익희(申翼熙)·김용철(金容喆) 등이 간사를 맡았으며, 회원이 51명까지 확대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는 데 기여하였다. 1923년 6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의정 활동의 주안점은 국민대표회의 이후 급격하게 약화된 임시의정원의 위상을 회복·강화하여 이를 토대로 임시정부를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1923~1924년 임시의정원 동료 의원들의 사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 옹호하고 직위를 지켜내도록 도왔고, 새로 도착하는 의원들에 대한 자격 심사도 특정 정파에게 유리하지 않도록 완화하는 데 앞장섰다. 이로 말미암아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가 굳건하게 유지되도록 노력하였다. 1924년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를 잠시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에 청년동맹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청년동맹회는 1924년 3월 21일 발기인 회의를 열어 창립 시기를 협의한 후 4월 1일 발기문을 배포하여, “첫째는 독립운동의 기치 아래 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하라, 둘째는 민족적 독립의 완성을 위해 희생적으로 분투하라”라는 강령을 제시하였다. 4월 5일 프랑스 조계 삼일당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강령과 임시 간장(簡章)을 통과시켰는데, 발기인이자 임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독립운동 전략으로 무장투쟁론을 정립하고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유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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