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羲
昌羲1885. 8. 8 ~ 1947. 1.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화천군 화천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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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2) 1885년 8월 8일 강원도 화천군(華川郡) 화천면(華川面) 신읍리(新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전개된 화천군 화천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3일 천도교 김화교구(金化敎區)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화천교구(華川敎區)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에 남은 천도교인들이 3월 23일 화천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 시위는 화천면 신읍리(新邑里)에 사는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였는데, 이때 천도교도로서 이은규(李殷奎)와 함께 주도적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당시 아들인 김희인(金熙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박성록(朴成祿)·김한식(金漢植)·김용구(金容九)·강석대(姜石大)·김한수(金漢洙) 등 21명을 모아 만세시위 계획을 의논하였다. 하남면 논미리(論味里)와 구운리(九雲里), 상서면(上西面) 노동리(蘆洞里), 화천면 풍산리(豊山里)에도 연락하여 3월 23일 시위 계획을 알렸다. 이은규의 아들 이달룡(李達龍)은 ‘대한독립국 만세(大韓獨立國) (萬歲)’와 ‘화천면민 대표자 김창희·이은규’라고 쓴 깃발을 제작하였다. 거사 전날인 3월 22일 풍산리에서는 구장 강진희(姜陳希)를 통해서 군중을 동원하려다가 만세시위 계획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주도자인 길호순(吉浩順)·박장록(朴章祿)·김중배(金仲培) 등이 붙잡혔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신읍리에서는 계획대로 시위를 추진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신읍리 주민들은 2개의 깃발을 앞세우고 장터로 향하였다. 가던 도중 직동(直洞)마을 물레방아가 있던 곳에서 노동리에서 한정종(韓丁鍾)이 이끌고 오던 시위대와 합세한 100여 명에 이르는 시위 군중이 그곳에서 만세를 부른 뒤 읍내 장터로 향하였다. 풍산리에서 시위 준비가 발각되면서 미리 이날 시위 사실을 알고 있던 헌병은 신읍리에서 화천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동지화(東芝花)고개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를 막았다. 헌병과 시위대가 격돌하면서 노가미(野上美喜男) 헌병 오장(伍長)과 하야사카(早坂茂利) 헌병 상등병이 시위대에 잡혀 뭇매를 맞고 짓밟혔다. 이 소식을 듣고 읍내에서 헌병 증원 부대가 출동하여 다시 시위 행진을 막았다. 급기야 헌병대가 총을 쏘며 진압하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날 만세시위를 계획한 신읍리의 천도교인들이 읍내에 들어오지 못하자 논미리와 구운리에서 출발하여 장터에 모였던 주민들도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하였다. 3월 23일 당일 화천면 만세시위 주도자로 붙잡혀 1919년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라는 이유로 징역 4년을 받은 뒤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이 해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이 취소, 징역 2년 6월을 받자, 다시 상고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당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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