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振烈
振烈1882. 11. 6 ~ 1956. 6.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양양군 손양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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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82년 11월 6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손양면(巽陽面) 우암리(牛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양양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손양면은 양양군 동면(東面)과 남면(南面)을 합쳐 만든 면이었다. 그래서 동면과 남면이 나뉘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동면은 유생과 양반 출신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만세시위 계획에는 가평리(柯坪里)와 송전리(松田里)에 사는 제주 고씨(高氏)들이 가담하였다. 4월 4일 양양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는 점심 무렵에는 4,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오후에 시위 지도부와 경찰이 전날 임천리에서 붙잡힌 22명의 석방 교섭을 하던 중 함홍기(咸鴻基)가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난 시위대는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부수었다. 경찰이 발포하여 손양면 간리(間里)에 사는 권병연(權炳淵)과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에 살던 김학구(金鶴九)가 즉사하였다. 8명의 부상자도 생겼다. 이 사건은 남면 사람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남면 구장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급하게 계획되었다. 이때 상왕도리(上旺道里) 구장 김종택(金鍾澤)의 주도 아래 주리(舟里)의 구장 최한두(崔漢斗)과 함께 시위를 계획하였다. 당시 우암리 이장으로 4월 5일 주민을 이끌고 양양읍 시장으로 향하였다. 가던 도중 하왕도리(下旺道里)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이를 물리치고 손양면에 있는 간리 고개를 넘어 행진하였다. 시위대의 맨 앞에는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지기(大韓獨立之旗)’라 쓴 깃발이 휘날렸고 그 뒤로는 주리에서 준비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쓴 깃발과 농악대가 따랐다. 시위대는 양양면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남대천(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5일에 이어 6일에도 만세시위를 벌인 도천면(道川面)과 강현면(降峴面) 주민들이 연창리(連昌里)에서 제지하는 군대를 물리치고 양양면내로 들어와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경찰이 그쪽으로 향한 틈을 타 손양면 주민들은 동서로 흩어져 들어가 시위 대열에 합세하였다.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시위 군중은 저녁에 해산하였다. 4월 5일과 6일 양일 간의 만세시위 주도자로 붙잡혀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그 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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