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振璿
振璿1885. 2. 27 ~ 1948. 1.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6)
관련 사건
- · 양양군 강현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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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6) 1885년 2월 27일 강원 양양군(襄陽郡) 강현면(降峴面) 침교리(砧橋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진선(金振璇)을 사용하였다. 1919년 양양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4월 5일과 6일 양양군 도천면(道川面)과 강현면(降峴面) 주민들은 강현면 물유리(沕溜里)에 있는 물치시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는 도천면 중도문리(中道門里)에 사는 이석범(李錫範)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능렬(李能烈)이 주도하였다. 이석범은 3월 3일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여 서울의 만세시위를 목격한 뒤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겨 3월 20일쯤 귀향하였다. 4월 5일 물유리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도천면에서는 김영경(金英經), 강현면에서는 장세환(張世煥)에게 주민 동원을 맡겼다. 음력으로 3월 3일 삼짓날인 4월 3일에는 중도문리에 있는 이종황(李鍾黃)의 집에서 친목계를 가장하여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구체적인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침교리에서 김원식(金元植)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주민 동원을 담당하였다. 4월 5일 강현면의 시위 군중은 물치 장터에 모였고, 도천면의 시위 군중은 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포리에 모였다. 강현면에서는 계획대로 아침부터 각 마을에서 주민들이 장산리의 면사무소로 집결하여 물치 장터로 떠났다. 이에 놀란 면장 김동석(金東錫)과 면사무소 직원들은 모두 도망갔다. 면서기 김남훈(金南薰)이 홀로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물치 장터로 모여든 시위대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마침 4월 5일에는 양양읍에서 손양면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대포리에서는 도천면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어 강현면의 만세시위는 헌병과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았다. 1919년 4월 5일 오전 10시 무렵 물치 장터에 있는 쌀가게 앞에서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대형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손에 태극기를 든 1,000여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강현면 시위대는 물치 장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약 10리 정도 떨어진 대포리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여 도천면민과 합세하였다. 시위대가 경찰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계속하자 주재소 이시다(石田喜三郞)순사가 군중에게 허리를 굽히며 빌었다. 이에 시위대는 다음날 양양면으로 가서 시위를 벌일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 도천면과 강현면 주민들은 양양면으로 향하였다. 일부 시위대는 4월 4일 양양면의 만세시위 때 사망한 김학구(金鶴九)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만세를 불렀다. 1,000여 명이 넘는 시위대는 양양면 연창리(連昌里)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일본에서 증파하여 4월 5일 원산항에 도착한 일본군 부대 중 1개 소대가 양양에 배치된 것이었다. 시위대는 일본군의 저지선을 뚫고 면소재지로 들어가 경찰서로 몰려갔다. 손양면(巽陽面)에서 온 시위 군중 약 3백 명도 합세하였다.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시위 군중은 저녁에 해산하였다. 4월 5일, 6일 양일 간의 만세시위 주도자 검거가 시작되면서 동료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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