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화
金在華1892. 7. 7 ~ 1920. 4.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진주군 진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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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2년 7월 7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집현면(集賢面) 하촌리(下村里)(현 진주시 하촌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초 심두섭(沈斗燮)·조웅래·박대업 등과 서울에서 고종 장례식에 참석한 다음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갖고 돌아왔다. 귀향 즉시 집현면 하촌리 자신의 집에서 이강우(李康雨)·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정용길(鄭鎔吉)·박용근(朴龍根)·정준교(鄭準敎)·심두섭·조웅래·박대업 등과 진주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수정하여 배포 준비를 마쳤다. 1919년 3월 10일경 주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제작해 비밀리에 배부하여 주민을 규합하자, 이를 눈치챈 일제 군경의 감시가 심해졌다. 거사일을 3월 18일 진주면 장날로 정하고 강달영 ·박진환 등과 함께 진주지역 각 사회 단체에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김영조(金永祖)는 기독교회측과 교섭키로 하고,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이영규(李永奎) 등은 시위행진 시 주악을 맡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 옛 대사지(大寺池) 매립지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선언서와 교유문을 살포하였다. 시위대는 큰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악대를 선두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시위 군중이 애국가를 제창하면서 행진하자, 일제 헌병과 경찰, 그리고 소방대까지 출동하여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시위 군중을 진압하였다. 오후 4시, 경남도청에 이르렀을 때 시위군중이 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저녁 무렵부터 일제 헌병과 경찰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을 체포하였다. 다음날인 3월 19일 오전 11시 읍내에서 악대를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고, 일제 헌병의 총검에 부상자가 늘어갔다. 진주면의 만세시위는 3월 21일까지 진행되었다. 이후 시위를 주도하였다고 하여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형집행이 정지되어 1920년 3월 29일 풀려났으나, 1920년 4월 1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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