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
金胄元1872. 4. 12 ~ 1949. 1.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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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2년 4월 12일 서울 정동(貞洞)에서 태어났다. 1915년 당시 서울 화동(花洞) 130번지에 거주하였다. 일제 검찰 자료에 따르면, 군부 경리국 제1과장 3등 감독(참령 상당), 황해도 연안 군수, 전남 옥과 군수를 역임하였고 국권상실 이후 서간도로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의 한커우지부장이 되었다. 신한혁명당은 1915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이상설(李相卨)·유동열(柳東說)·성낙형(成樂馨)·이춘일(李春日)·유홍열(劉鴻烈) 등이 조직하였다. 조직은 본부와 지부로 구성하고 본부장에 이상설을 추대하고, 외교부장 성낙형, 교통부장 유동열, 재정부장 이춘일, 감독 박은식이 담당하였다. 지부로는 상하이지부장 신규식, 창춘지부장 이동휘(李東輝), 회령지부장 박정래(朴定來), 옌지(延吉)지부장 이동춘, 나남지부장 강재후(姜載厚)가 선임될 때 한커우지부장에 임명되었다. 신한혁명당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이길 것이라고 예견하고 중국·독일과 군사동맹을 맺어 일본과 독립전쟁을 치르자는 것이 핵심 목표였다. 광무황제를 신한혁명당의 당수로 추대하고 중국 정부와 신한혁명당의 한국 망명정부 사이에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군사동맹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는 방략을 세웠다. 1915년 5월 초 광무황제의 위임장 확보를 위해 외교부장 성낙형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성낙형은 앞서 국내에 있던 변석붕(邊錫鵬)에게 계획을 설명하고 동지를 규합할 뜻의 통신문을 발송하였다. 7월 7일 성낙형과 함께 변석붕과 접촉하여 신한혁명당의 계획을 전하였다. 성낙형과 국내조직원 변석붕·심인택(沈仁澤)·정일영(鄭日永)·박봉래(朴鳳來) 등이 모여 중한의방조약 체결에 필요한 광무황제의 위임장을 받을 방도를 논의하였다. 광무황제에 직접 접근방안, 이강 공을 통한 접근방안, 구 양반 간에 동지규합 방안 등으로 나누어 심인택·정일영·박봉래가 각각 주무자로 선정되었다. 심인택은 정일영과 상의하여 시회회원으로 덕수궁과 연고가 있던 김승현을 적임자로 결정하였다. 1915년 7월 17일 심인택과 정일영은 김승현을 만나서 당의 계획을 알리고 이를 실행할 적임자를 물색하였다. 7월 24일 김승현은 광무황제를 모시던 덕수궁 내승(內丞)인 염덕신(廉德臣)을 설득하여 광무황제에게 밀지 전달 작전에 동참하겠다는 승낙을 받았다. 이후 성낙형·심인택·김승현 등과 협의하여 ‘중국·독일이 일본을 연공(聯攻)하는 것이 대세’란 경각서의 취지를 기재한 문서를 7월 26일 오전 1시 경 염덕신에게 주어 광무황제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중한의방조약안’의 체결 계획에 관한 허락을 받아오도록 명령하였다. 염덕신은 1915년 7월 26일 오후 12시 경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광무황제에게 당의 독립운동계획을 설명한 서찰과 관계 서류를 전했으며 곧이어 성낙형의 알현 허가도 받아냈다. 그러나 광무황제와의 만남이 성사되기 전에 발각되어 성낙형·변석붕 등과 더불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5년 10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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