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기
郭在驥1893. 2. 7 ~ 1952. 1.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동청년당
- · 의열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밀양폭탄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3년 2월 7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강외면(江外面, 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리(上鳳里)에서 농민 곽신엽(郭信燁)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玄風)이며(『청주곽문문족사(淸州郭門門族史)』에는 ‘청주’로 되어 있음) 자는 경(敬)이었고, 김광삼(金光三)·김재만(金在萬)이라는 이명을 쓰기도 했다. 어려서 백부 곽지엽(郭芝燁)의 대를 잇고자 입양된 후 향리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설립한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를 다니며 김규식(金奎植) 등에게 배웠다. 졸업 후 귀향하여 1907년 광남학교(廣南學校) 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는 1904년 방흥근(方興根)·김태희(金泰熙) 등 지역 내 기독교도 청년들이 설립한 것이었는데, 1908년 미국인 선교사 밀러(F. S. Miller, 민노아(閔老雅))에게 인수되면서 '청남학교(淸南學校)'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몇 년 후에 신민회(新民會) 계열 인사들과 영남 지방의 민족 지사들 중심으로 1909년부터 조직된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2일 청주 일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는데,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결정되어 한 달 만에 풀려났다. 동년 7월, 국외 독립운동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만주 지린(吉林)으로 건너갔고, 그곳의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 일명 길림군정사)의 회계과장 황상규(黃尙奎)와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단군기원 4252년 2월'에 지린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의 말미에 주창한 ‘육탄혈전’을 위한 청년결사대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벌일 것에 합의하고 구체적 방안을 함께 숙의하였다. 그 후 김원봉(金元鳳)이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古山子)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규합하여 데리고 온 이성우(李成宇) 등 여러 명의 생도 및 졸업생, 국내 3·1운동 참여 후 지린으로 망명해 온 윤소룡(尹小龍, 윤세주(尹世冑)) 등의 청년 지사 몇몇과 함께 10월부터 지린성(城) 파호문(巴虎門) 밖의 한 중국인 집에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 및 사용법을 익혔다. 이어서 11월 10일, 동지 9명과 함께 작탄투쟁(炸彈鬪爭)의 결사대적 조직으로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하면서 부단장(副團長)으로 선임되었다(단장 김원봉). 그 무렵의 한 일제 문서에 투탄·암살 방법으로 조국 독립을 달성코자 결성된 소년단(少年團)의 지린지부장으로 거명된 것은 위의 사실이 일제 관헌의 첩보망에 부정확하게 포착되어서였던 듯하다. 의열단은 총독 통치하의 일본인 고관과 한국인 민족 반역자 부류, 식민지 지배의 정치 기관·선전 기관·폭압 기구·수탈 기구 및 부속 시설물을 겨냥한 고강도의 '암살 파괴 운동'을 전개할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고, 제1차로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등 3대 일제기관 투탄 폭파와 요인 암살의 특공 거사를 감행키로 결의하였다. 창립 단원 거의 전원이 동참할 이 계획의 추진을 위해서는 폭탄 획득이 급선무였기에, 12월에 상하이(上海)로 가서 김원봉·이성우와 함께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보강리(寶康里) 김대지(金大地)의 집에 유숙하면서 폭탄 구입에 힘썼다. 1920년 3월 한 중국인에게 폭열탄(爆聯彈) 3개 제조용 폭약과 탄피 등을 구입하여 김원봉·이성우·김기득(金奇得)과 함께 김대지의 집에서 조립하여 포장하였다. 그것을 장건상(張建相)의 소개로 안둥현(安東縣)의 영국인 세관원 S. 보잉에게 소포로 우송한 후, 다롄(大連)을 거쳐 안둥으로 가서 황상규·이성우·김기득·윤소룡 등과 함께 이낙준(李洛俊)의 집에서 폭탄의 국내 밀반입 방책과 국내 상황 조사 및 자금 변통에 관해 의논하였다. 거기서 도출된 방안대로 보잉에게서 인수한 소포를 의열단 연락 기관인 원보상회(元寶商會)의 이병철(李丙喆)에게 넘겨주었다. 이병철은 그것을 수수 20가마의 화물 속에 숨겨서 4월 12일 밀양으로 밀송한 후 뒤쫓아 가서 화물을 인수하여 김병환(金鉼煥)의 미곡 상점으로 옮겨 놓고 거사 때까지 맡아두도록 하였다. 3월 20일경 밀입국하여 밀양으로 가서 한봉근(韓鳳根)·신철휴(申喆休)·윤세주와 만나 투탄 결행을 담당토록 지시하였다. 뒤이어 서울로 가서 서상락(徐相洛)·김상윤(金相潤)을 만나 폭탄 도착 사실을 알리고 실행 준비를 명한 후, 안둥을 거쳐 상하이로 가서 김원봉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러고는 지린으로 가서, 2차분 폭탄 13개의 구입 및 운반과 국내 밀반입에 직접 관여한 이성우와 합류하고, 5월 13일경 안둥을 거쳐 서울로 같이 잠입하여 공평동(公平洞)의 전동여관(典東旅館)에 거처를 잡고 거사 지휘소로 삼았다. 그 후 밀양으로 가서 2차 밀반입 폭탄 13개의 보관 책임자인 이일몽과 회견하고 조속 실행이 단장의 뜻임을 전하였으나, 결행과 동시에 뿌릴 격문의 인쇄 비용을 조달해야 하므로 시기를 기다린다는 답변을 듣고는 자금 조달을 위해 대구로 갔다. 6월 들어 상하이에서 총지휘 중이던 김원봉의 "20일 내로 결행하라. 결행자와 일시를 통지하라"라는 지시를 편지로 받은 안둥의 이낙준이 서울에 들어오자, 황상규·김기득 등과 함께 그를 만나 김원봉의 지시를 고지받고, 김기득에게 부산으로 가서 이일몽에게 즉시 폭탄을 서울로 갖고 오라는 명령을 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몽이 며칠 뒤 휴대 상경하겠다면서 또 미루는 사이에 6월 16일부터 이성우·윤소룡·황상규 등이 서울에서 연이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갔다. 안둥에서 밀양으로 수상한 화물이 운송되었음을 3월 하순에 첩지(諜知)한 경기도 경찰부에서 은밀히 수사하던 중에 경부(警部) 김태석(金泰錫)이 밀정들을 풀어 단원들의 거처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일제 경찰의 체포 작전이 개시되었음을 감지한 뒤 마포로 피신하였다가 청주를 거쳐 마산으로 가서 이일몽과 만나, 한 달쯤 뒤에 실행하기로 합의하고 밀양으로 갔다. 그러다가 경찰이 잠복해 있음을 알고 삼랑진을 거쳐 부산으로 피신하였지만, 7월 5일 복성여관(福成旅館)에서 체포되었다. 8개월여 동안의 경찰 조사와 검사국 예심 과정에 온갖 고문과 악형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장의 신문에 폭탄 거사 계획의 이유를 당당히 피력하여, "재작년 3월 이래로 조국 독립을 입과 붓으로는 구할 대로 구하고 원할 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었음에서, 무기를 사용하여 혈전을 벌이려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군함도 대포도 없이 오직 폭발탄과 육혈포밖에 구할 것이 없었노라"라고 답변하였다. 1921년 6월 21일의 선고공판에서 '폭발물취체벌칙'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죄목으로 징역 8년 형을 선고받고 마포의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일부 감형되어, 1927년 1월 22일 만기 출옥하였다. 매월 면회를 다닌 어머니의 정성이 신문에 수차 보도되곤 하였다. 출옥 후 처가가 있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으로 거주를 옮기고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의 에스페란토어 교사로 재직하였다. 1932년 3월 2일 영명학교 기숙사에 반제 격문이 살포된 사건과 관련된 혐의로 붙잡혀갔다가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 후 충북 청주군 사주면(四州面) 금천리(金川里)로 이사하였는데, 정신이상 증세가 생긴 나머지 1932년 9월 22일 자택에서 부인 윤태근(尹泰根)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경찰에 자수하였다. 1심에서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2심에서 범행을 극구 부인하였지만, 1933년 1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구형대로 12년 형이 선고되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와 상하이 등지를 유랑하며 생활하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1월 귀국하였고,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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