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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顯奎

顯奎

미상 ~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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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顯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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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金海)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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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확인할 수 없다. 출신지는 경상남도 김해(金海)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이명은 김형규(金炯奎)이다. 의병활동을 하다가 희생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전후하여 항일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 무렵 이강년(李康秊) 휘하에서 강원도 남부의 각 군을 돌면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울진(鬱珍)으로 내려갔다. 1906년 (음)1월경 삼척(三陟) 출신 김하규(金河圭)에게 “우리는 지금 나라를 위해 일제를 물리치려 하니 자네도 함께 소모에 응하라”고 제의하여 포군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울진에 도착하여 1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1906년 2월 19일 이현규(李鉉圭) 부대와 합세하였다. 이현규 부대는 1905년 11월 청송(靑松) 진보(眞寶)에서 거병한 후 1906년 2월 울진으로 들어와 불영사(佛影寺)에 주둔해 있었다. 이때 전재호(田在浩)·김용욱(金容旭) 등 울진 지역 인사들도 다수 참가하였다. 늘어난 군사들로 부대를 재편성하고 불영사에 본부를 정한 뒤 군사를 훈련하였다. 그 규모는 약 500명이었다. 당시 울진은 강원도 최남단에 속했기 때문에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의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영해(寧海)의 신돌석(申乭石)과 영천(永川)의 정용기(鄭鏞基)와도 제휴하였다. 1906년 2월 19일 이현규 등과 함께 울진군 근북면(近北面)에서 일본인으로부터 총 한 자루와 한화 60냥을 징발하는 등 울진·평해 지역에서 군사와 무기를 확보하였다. 4월 5일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였고, 이어서 서면 삼근리(三斤里) 창고에 쌓여 있던 봉화(奉化) 토호(土豪) 강재산(姜才山)의 소작미 100여 석을 희사 받아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의병의 공격목표는 일본 어민과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분견소, 그리고 일제 침략 말단기관인 우편취급소와 행정관아 및 징세기구인 재무분서 등이었다. 울진군수 윤우영(尹宇榮)의 요청을 받은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에서는 정교(正校) 정달수(鄭達洙)와 함께 병졸 4명, 단양병참부대 병졸 10명을 의병이 유진하고 있는 불영사로 출동시켰다. 야밤에 이들의 공격을 받아 대치하던 중 울진의 토착 세력인 아장 주낙조(朱洛朝) 무리의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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