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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경

金憲卿

1851. 11. 30 ~ 1910.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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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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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삼척(三陟)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삼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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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51년 11월 30일 강원도 삼척군(三陟郡) 북평면(北坪面) 단봉리(丹鳳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강원 강릉(江陵)·삼척·울진(蔚珍) 등 여러 곳에서 모집한 삼척의병을 이끌고 활동하던 중 관동의진(關東義陣)과 합세하여 항쟁하였다. 관동의진은 민용호(閔龍鎬)가 강원 강릉에서 일으킨 의병부대이다. 민용호는 경기도 여주(驪州)와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대관령(大關嶺)을 넘어 강릉으로 들어갔다. 강릉에서 관동9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한 뒤 병력을 보충하고 함경도 원산(原山) 공격을 위해 북상하였다. 그러나 1896년 (음)3월 19일 안변(安邊)의 선평(仙坪)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강릉으로 회군하였다. 선평전투에서 패한 민용호는 각 지역에 격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도 군사 6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강릉의진은 같은 해 (음)4월 12일 새벽 관군의 공격을 받고 격렬한 공방전(攻防戰)을 벌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강릉을 버리고 정선군(旌善郡) 임계(臨溪)로 물러났다. 다시 백복령(白伏嶺)을 넘어 동해안을 따라 삼척에 도착하였다. 이때 강릉의진은 삼척의병과 합세하였다. 민용호는 강릉을 상실한 뒤 삼척을 중심무대로 삼을 계획이었다. 삼척에 기반을 다져 놓은 삼척의병이 합세하였으므로 부대가 재편성되었다. 선봉장 김도현, 수성장 민동식(閔東植), 중군 최중봉(崔重峰)·강우서(姜禹瑞)·이영찬(李永燦) 등이 임명되었다. 이때 유진장(留陣將)이 되어 서울 경군(京軍)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강릉의 승세를 몰아 의병을 추격하여 강릉의 화비령(花飛嶺)을 넘어 1896년 (음)4월 14일 새벽 삼척에 이르렀다. 관군이 몰려온다는 정보를 얻은 민용호는 삼면(三面)으로 의병을 배치해 놓고 관군이 접근해 오면 포위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유진장으로서 죽서루(竹西樓) 동쪽에 진을 쳤다. 반면 선봉장과 수성장은 성 안에 매복하였고, 대장은 중군들과 함께 뒤편 삼봉산(三峰山)에 매복하고 관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관군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이날 전투는 오전 5시경부터 오후 5시경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의병은 처음에는 유리한 지형과 맹렬한 공격으로 우세한 입장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탄약의 고갈로 인해 결국 오십천변(五十川邊)으로 물러났다. 여기서 김도현부대는 민용호와 작별하고 영양으로 회군하였다. 민용호도 삼척을 포기하고 정선(旌善)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를 삼척전투라고 한다. 삼척전투에서 패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며 의병 활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1910년경 친일 주구배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같은 해 5월 5일 경성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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