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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夏林

夏林

1846 ~ 1909.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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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夏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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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奉化)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봉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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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김도화 의병부대
  • · 김도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1) 1846년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내성면(乃城面, 현 봉화읍) 해저리(海底里)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봉화에서 의성 김씨의 집성촌으로 잘 알려진 해저(海底)마을 출신이어서 ‘해저 김문(金門)’이라고도 한다. 1901년 도산서원 기록인 「도산서원묘변시일기(陶山書院廟變時日記)」를 보면 서원의 임원직에 해당하는 수장의(首掌議)를 역임한 것으로 보아 안동의 유림들과 서원을 중심으로 함께 적극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을미의병 당시 유창식(柳昌植)·유난영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의병 봉기시 안동 의병부대 간부로 활동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봉화 해저마을의 유력한 가문의 일원이자 정재학파의 일원으로 적극적으로 안동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1895년 12월에 들어선 김홍집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신임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유림의 고향 안동에서 단발을 자행하여 커다란 공분을 샀다. 여기에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896년 1월에 안동에서도 서원을 중심으로 통문을 돌려 유생들이 궐기하였고, 이는 제 1차 안동 의병부대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1896년 1월 21일 안동 의병부대 간부진이 편성되었을 때 서기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안동 의병부대는 부장에 곽종석(郭鍾錫), 참모에 유연박(柳淵博) 등을 포함하여 46명이 간부진이었다. 그 중 이운구(李雲九)·김진휘(金縉輝)·유연집(柳淵楫)·김한락(金翰洛)·이종만(李鍾萬)·이성구(李性求)·유회식(柳晦植) 등과 함께 서기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51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는 서기를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월 23일에 권세연이 의병대장에 추대되고 이튿날 안동부를 점령하면서 1차 안동 의병부대의 조직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1월 29일 벌어진 풍산전투에서 안동 의병부대는 대구로 도주하였던 관찰사 김석중이 이끌고 온 관군에게 패배하고 본부인 안동부를 빼앗겼다. 그 결과 의병대장 권세연은 사퇴하고 의병부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인근의 봉화·영천·선성·풍산 등지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 무렵인 2월 4일 봉화의 도총(都摠) 자격으로 포병 60여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 결과 안동 의병부대는 다시 안동부를 탈환할 수 있었고 도주하던 김석중은 문경의 이강년 의병부대에 의해 참수되는 한편 2월 5일에는 순검 1인을 제남루에서 사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3월 14일 안동 의병부대는 새로운 의병대장 김도화를 맞이하면서 제2차 안동 의병부대로 재편되었다. 대장에 김도화, 중군장에 권재호(權載昊), 도총에는 유난영(柳蘭榮)이 임명되었고, 이때 부장(副將)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도총 유난영이 풍산 출신으로 병산서원 중심의 병파(屛派)였기 때문에 기존의 주류 세력인 호계서원의 호파(虎派)와 대립 양상을 보이며 견해 차이를 보였다. 그러던 중 유난영은 2월 23일 적과의 내통을 이유로 호좌 의병부대의 서상렬(徐相烈)에게 체포되어 약 두 달간 도총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이때 얼마간 도총을 대신하는 부총(副總)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4월에 있었던 봉정사 전투 패배 후에 유난영이 관군에 체포되자 도총이 되어 자리를 채웠다. 새롭게 편성된 안동 의병부대는 주변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위해 예천회맹(醴泉會盟)을 열고 연합 의병부대를 형성하여 남하 중이던 호좌 의병부대와 합류를 꾀하였다. 그러기 위해 연합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던 함창(咸昌)의 태봉(泰峰)을 3월 29일 공략하게 되었다. 이때 안동 의병부대에서는 중군장 권재호에게 250여 병력을 주고 전투에 참여하게 하였으나 참담하게 패배하였다. 승리한 일본군은 안동을 점령하고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 한편 남아 있는 안동 의병부대까지 압박해 왔다. 이에 김도화를 비롯한 안동 의병부대는 서둘러 퇴각하였고 4월 2일에는 풍산에서 다시 패하였으며 봉정사에서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도총 유난영이 체포되었다. 이어진 안기역(安奇驛)(현 안동시 안기동, 운안동 일대) 뒷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의병부대는 참패하여 겨우 남은 병력을 수습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이때 유난영을 대신해 도총 자리에 올라 의병대장인 김도화를 보좌하며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는 데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 김도화도 철수를 거듭하였으나 중앙 정부의 회유와 일본군의 기습과 장마로 인한 피로까지 더해지면서 의병부대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끝내 김도화를 비롯한 안동 의병부대는 1896년 7월에 이르러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도총으로서 항전의 의지를 꺾지 않고 6월 말경 600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춘양에서 봉성을 거쳐 봉화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풍기로 들어온 관군을 피하기 위해 봉화의 황전(黃田)(현 경북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마을로 이동하였다. 이즈음 을미의병기의 마지막 항전 부대인 김도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도현 의병부대는 예천회맹 당시 선성 의병부대로 태봉 전투에 참전하였고 패배 후 김도화의 안동 의병부대의 구원 요청에 응하였으므로 인연이 있었다. 이후 김도현은 6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독립부대로 활동하면서 평해·울진·삼척 등 경북 동북부 일대로 북상하여 강원도 강릉의 관동 의병부대와 합류해 항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5월 31일에 벌어진 관군과의 삼척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김도현은 다시 본거지인 영양으로 돌아와 인근의 안동·청송·영덕 등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안동에서 합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8월경 김도현과 김하락 의병부대와의 연합에 대해 논의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김도현 의병부대가 해산한 10월 15일까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안동 의병부대가 이미 해산한 8월까지 항전을 지속하였다. 이후 고향 봉화로 돌아가 다시금 안동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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