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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복

金致福

1867 ~ 1914.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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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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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영흥(永興)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영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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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박형운 의병부대(박형운의진)

포상 정보

  • · 애국장(200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9) 1914년 당시 48세로 1867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운곡면(雲谷面) 천을리(天乙里)에 거주하였다. 1908년 평안남도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광무황제는 7월 19일 황제의 직을 양위하였다. 또한 7월 24일 정미7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행정권을 일제에 병탄 당하였고, 협약의 시행령에 준하는 「부수각서(附隨覺書)」를 통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친위대(親衛隊)와 시위대(侍衛隊)를 시작으로 9월 3일 함남 북청(北靑) 진위대(鎭衛隊)에까지 해산령이 하달, 강제로 해산되었다. 일제는 1907년 9월 이른바 총포 및 화약단속법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였고, 기존에 소지한 총포류는 반납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분기하였다. 일제는 1907년 7월 하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이전에 한국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이후 의병 탄압을 목적으로 도합 4차에 걸친 여단 급 병력을 증파하였다.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약 5,000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에는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07년 11월에서 1908년 7월까지 매달 평균 1,000여 명의 의병을 학살하였다. 관서 지역은 총포류 소지 금지조치 이후 이에 불복한 산포수들이 중심이 된 정미의병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산포수로서 함남 영흥군에 거주하다가, 1908년 (음)6월 15일경 의병장 박형운(朴亨雲)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평남 양덕군(陽德郡) 용산리(龍山里), 윤촌(尹村), 윤종동(尹宗洞), 지경리(地境里), 하국수동(下國水洞), 지동(池洞) 백구룡리(百九龍里)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평남 성천군(成川郡) 기동(岐洞)에서는 연초상을 하던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이 일로 1910년에 붙잡혀 1914년 2월 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이후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그 해 4월 6일 평양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4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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