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鎭哲
鎭哲1848 ~ 1909.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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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전라북도 금산군(錦山郡) 부내면(府內面) 출신이다. 190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61세로 1848년생으로 추정된다. 1908년 경상북도 청송(靑松) 지역에서 활동하던 서주일(徐周一)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고종은 7월 19일 순종에게 황제의 직을 양위하였다. 또한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행정권을 일제에 박탈당하였다. 나아가 협약 시행령에 준하는 부수각서(附隨覺書) 내용을 통해, 일본인이 대한제국 사법 관리에 임용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1907년 8~9월에 걸쳐 대한제국 군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대한제국 군인들은 이 조치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으로 분기하였다.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 군대 해산으로 인해 궐기한 이들을 가리켜 정미의병 혹은 후기의병이라 부른다. 전국적인 의병항쟁에 일제는 이른바 의병 ‘토벌’에 나섰다. 1907년 7월 하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에 일제는 한국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이후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모두 4차에 걸친 여단 급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에 따라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약 5,000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에는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07년 11월에서 1908년 7월까지 매달 평균 1,000여 명의 의병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라도 지역은 을미의병 이래 노사학파(蘆沙學派)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계열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며, 1907년을 전후하여 경북 청송 지역에서도 강진선·서종락·남석우 등이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8년 3월 의병장 서주일(徐周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경북 청송군(靑松郡) 부동면(府東面)·부남면(府南面)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8년 12월 일본군에 붙잡혀 1909년 1월 25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09년 3월 30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4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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