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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鎭先

鎭先

1880 ~ 1909.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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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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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의병

포상 정보

  • · 애국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6) 출신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자료에 따르면 188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황해도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고종은 7월 19일 순종에게 황제의 직을 양위하였다. 또한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행정권을 일제가 장악하였고 내정 감독을 일본 통감이 담당하게 되었다. 나아가 협약 시행령에 준하는 부수각서(附隨覺書)를 내용을 통해, 일본인이 대한제국 사법 관리에 임용되게 되었다. 또한 징병제에 의한 정예군을 양성한다는 미명 하에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8월과 9월에 걸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나아가 일제는 1907년 9월 ‘총포급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였고, 기존에 소지한 총포류는 반납할 것을 지시하였다. 기존 유림 중심 의병부대에 더하여, 대한제국 군인들과 산악 지역 산포수들은 이러한 조치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으로 분기하였다.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및 군대 해산으로 인해 궐기한 이들을 정미의병, 혹은 후기의병이라고 한다. 1907년 7월 하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 일제는 한국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이후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도합 4차에 걸쳐 여단 급 병력을 증파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약 5,000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에는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07년 11월에서 1908년 7월까지 매달 평균 1,000여 명의 의병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황해도 지역은 을미의병 이래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당시 황해도 연안군(延安郡) 갈천동(喝川洞)에 거주하면서 1909년 고주서(高周西)를 의병장으로 하는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고주서는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인 이진룡(李鎭龍) 의병부대의 부대장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1909년 5월 29일 풍천교(楓川橋), 도성(桃城) 부근에서 연안수비대 관헌에 의해 피살되어 30세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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