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鎭九
鎭九1847. 10. 15 ~ 1925. 3.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7) 1847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상주군 사벌면(沙伐面) 매호리(梅湖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성소(聖韶)이며, 호는 구고(九皐)다. 가족관계와 성장과정 등을 알 수 있는 등에 관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운강선생창의일록』 을 통해 1907년 재거의한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강년은 이미 1896년 문경에서 거의하여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합류하여 유격장(遊擊將)으로 명성을 떨친 경험이 있었다. 을미의병이 끝나자 이강년은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사군지역을 중심으로 뿌리내린 화서학파와 의병투쟁론자들과 교유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이강년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재기를 노리던 기간 동안 유인석 휘하에 있으면서 사군지역으로 그 활동 범위를 넓히다가 1907년 충북 제천에서 거의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부상을 입고 은신하였다. 이후 윤기영(尹起榮)이 해산된 원주진위대로부터 무기를 얻어 군사를 모았다는 소식을 듣고 종사 11명과 함께 원주로 갔다. 의병부대와 함께 제천으로 내려와 천남(泉南)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강년 의병부대는 주천으로 이동하였다. 사군지역에서 군사를 모아온 김상태(金尙台)와 40여 개 의병부대의 부대장들의 추대로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된 이강년은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운강선생창의일록』 에서 장임록(將任錄)과 참모부(參謀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이강년과 함께 부대를 실질적으로 이끈 지도층이었고, 종군하며 일본군과 실제로 전투를 치룬 이들은 종사부(從事部)로, 각 거주지에 머무르며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해 부대에 알려주고 식량이나 숙소, 군수 물자를 제공한 이들은 좌종사부(坐從事部)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좌종사로 활약하였다. 언제 의진에 가담하여 어떤 상황에서 의진을 지원하였는지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좌종사’가 맡은 임무를 고려했을 때 이강년 의병부대가 경북 북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거주하던 상주를 중심으로 경북 일대에서 부대를 지원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근거지를 자주 옮겨 다니며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펼치던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좌종사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지역 지리에 밝은 거주민이 제공하는 지리 정보와 일본군의 동태는 의병부대가 험악한 산세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여러 곳을 옮겨 다니기 위해서는 숙소를 비롯한 군수물자의 제공이 필수적이었다. 대부분 유생 출신 의병장들이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을미의병기 주로 문중으로부터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 이강년 의병부대는 백성이나 지방 유지로부터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좌종사들의 활약은 이강년 의병부대가 장기 항전을 계속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던 이강년이 1908년 10월 사망하면서 침체되었고, 이후 이강년 휘하에 있던 김상태가 계속 부대를 이끌었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1925년 3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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