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仲九
仲九1889 ~ 1911. 6.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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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오서면(五西面) 예동(禮洞)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09년 당시 21세였던 것으로 보아 188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전남 지역의 정대홍(鄭大洪) 의병부대에 합류하기까지 행적은 알 수 없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고종은 7월 19일 순종에게 황제 직을 양위하였다. 또한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행정권은 일제에 빼앗겼고, 내정 감독을 일본 통감이 담당하게 되었다. 나아가 협약 시행령에 준하는 부수각서(附隨覺書) 내용을 통해, 일본인이 대한제국 사법 관리에 임용되게 되었다. 또한 징병제에 의한 정예군을 양성한다는 미명 하에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친위대(親衛隊)와 시위대(侍衛隊)를 시작으로 9월 3일 함남 북청(北菁靑) 진위대(鎭衛隊)에까지 해산령이 하달, 공식적으로 해산되기에 이른다. 나아가 일제는 1907년 9월 총포급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였고, 기존에 소지한 총포류는 반납할 것을 지시하였다. 대한제국 군인들과 산악 지역 산포수들은 이 조치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으로 분기하였다.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및 군대 해산으로 인해 궐기한 이들을 가리켜 정미의병, 혹은 후기의병이라 부른다. 이전 의병이 주로 비전투원의 결집에 의한 비정규군의 성격을 가졌다면, 이 시기의 의병은 군인과 포수의 참여로 인해 군사기술이 전문화되는 경향을 띠었고, 지휘체계 또한 대한제국 군제와 유사한 형태로 운용되었다. 또한 의병부대간의 연합작전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장기항전을 위한 거점과 군자금 및 군량미를 수급할 수 있는 기반 마련에 힘썼다. 이에 일제는 의병 ‘토벌’에 나섰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 창설된 이래, 1907년 7월 하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에 일제는 한국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이후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도합 4차에 걸친 여단급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에 따라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약 5,000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에는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07년 11월에서 1908년 7월까지 매달 평균 1,000여 명의 의병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라도 지역은 을미의병 이래 노사학파(蘆沙學派)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계열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이러한 시기에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정대홍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1909년 전북 무장군(茂長郡) 탁곡면(托谷面) 흥룡리(興龍里)에서 군자금을 모았다. 정대홍 의병부대는 그 해 3월 고창군 산내면(山內面) 운곡리(雲谷里)에서 일제의 밀정을 척살하였다. 이후 일본 군경에 붙잡혀 1909년 10월 6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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