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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喜

正喜

1863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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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正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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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의병

포상 정보

  • · 애국장(2006)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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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6) 출신지는 미상이다. 1910년 당시 판결문에 보면 의병활동 당시 강원도 홍천(洪川) 내촌면(乃村面) 화성대(和成垈)에 거주하였고, 48세로 1863년생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 지방 군대인 진위대(鎭衛隊)의 군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6월 고종 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자 일제는 고종 황제를 그를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 즉위 후 불과 며칠 후인 1907년 7월 24일 이완용(李完用)을 내세워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통감부에 위임하게 하였다. 대한제국 군대인 서울의 시위대(侍衛隊)에 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大隊長) 참령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하였고, 이에 일본군과 해산 군인들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8월에는 일제의 해산 조치에 맞서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의 특무정위(特務正尉) 민긍호(閔肯鎬)가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지휘하여 원주 시내에서 일본 군경(軍警)과 전투를 벌였다. 민긍호 의진은 이후 여러 개의 소규모 부대로 재편성되어 강원과 충청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1907년 7월 4일 한갑복(韓甲福) 의병부대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1908년 (음)6월 말까지 신봉학(申鳳學)과 김덕문(金德文) 의병부대에서 지속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09년 3월 17일 경성지방재판소 춘천지부에서 1차 판결을 받고, 항소하여 같은 해 4월 17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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