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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鴻培

鴻培

1886. 11. 2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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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鴻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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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만주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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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천마산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1) 1886년 11월 22일 서울 종로구(鍾路區) 안국동(安國洞)에서 태어났다. 가족관계와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렵다. 1920년대 천마산대(天摩山隊) 대원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무렵 천마산대(天摩山隊)의 대원이 되었다. 천마산대는 1920년 3월 평안북도 출신의 인사들이 모여 의주군 고녕삭면(古寧朔面)에 있는 천마산(天摩山)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조직한 항일 무장단체였다. 천마산대 초기 간부진은 사령관 최시흥(崔時興), 부관 최지풍(崔志豊), 참모 박응백(朴應伯)·박영찬(朴泳燦)·최윤희(崔允熙), 경리 김세진(金世鎭), 중대장 최의집(崔義輯), 소대장 김상옥(金尙沃)·김용택(金龍澤) 등이었다. 천마산대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단체이면서도 만주 지역의 독립군단과 같은 편제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이 단체가 서간도(西間島) 독립군단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별동대였기 때문이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초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에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기관으로 성립된 광복군 소속 특수 부대였다. 이 광복군총영은 국내에 별동대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면서 천마산대를 설립하고자한 주역들과 연계되었다. 따라서 천마산대는 광복군총영의 국내 별동대가 되었고 설립 이후 총영의 인적 물적 지원을 받으며 항일 무장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따라서 간부진이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고, 대원 총수 또한 총영의 지원 강도에 따라 40명에서 많게는 200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천마산대의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서울 출신이지만, 서간도로 망명해 광복군총영원이 되었다가 국내로 파견되어 천마산대 대원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천마산대는 국내에 근거지를 구축했기에 일제 군경의 추적을 받아 쉽게 발각될 위험성도 있었지만, 기동성을 발휘해 침략자들을 응징할 수 있는 장점도 가졌다. 이 때문에 성립 후 4개월 정도 지난 그 해 6월까지 20회가 넘는 작전을 펼쳐 4천 7백여 원의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한 친일파와 일제 군경 처단했으며,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고 파괴하였다. 천마산대 대원들의 과감한 유격전에 평안북도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일제의 기관장이나 친일파 무리들은 불안을 느낀 나머지 상부에 전보를 요청하거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광복군총영의 지원을 받아가며 천마산대 대원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서북간도의 한인사회와 독립군들은 큰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독립군들의 국내 진입전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10월, 약 2만 명의 일본군들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켜 3천 7백 명에 가까운 한인을 살해하고, 3천 3백 채가 넘는 한인의 가옥·교회·학교 등을 파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자행하였다. 이 같은 참변을 당하자 광복군총영의 지휘부와 독립군들도 산간 오지로 피신을 해야 했기에 국내의 천마산대를 지원하기가 어려웠다. 반년이 넘는 기간 만행을 자행하고 일본군이 이듬해 4월부터 철수하자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南滿洲)의 독립군 지휘관들과 독립군들은 피신했던 산간오지에서 나와 재건을 서둘렀다. 남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재건을 위해서는 먼저 힘을 합해야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통합운동을 전개한 결과 1922년 1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한단(光韓團) 등을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성립시켰다. 이어 그 해 여름까지 통군부를 중심으로 통합운동을 계속 추진해 광복군총영·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 등 17개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이하 통의부)를 만들었다. 본부가 있는 남만주 상황이 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동안 천마산대도 국내에서의 활동이 점점 어려워졌다. 수많은 기습 공격을 당한 일제는 대병력을 동원해 수색전을 벌이며 근거지로 좁혀져왔다. 게다가 본부의 지원 또한 원활하지 못해 효율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힘들었다. 결국 천마산대도 국내의 활동을 접고 남만주로 넘어가 통의부에 편입되었다. 통의부는 이주 한인사회와 독립군 기지 재건, 항일 독립전쟁 수행 등 두 목표를 세우고 성립되었다. 따라서 전자를 수행하기 위한 자치조직과 후자를 실천할 통의부 의용군 등 두 갈래의 조직이 편성되었다. 천마산대는 국내에서 근거지를 구축하고 오래 동안 활동했다는 특수성이 인정되어 5개 중대로 편성된 의용군의 제3중대에 편제되었다. 이때 의용군이 아닌 재건을 위한 자치 조직의 구성원이 되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였기에 무장 독립군 보다는 자치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통의부의 자치 조직은 중앙에 조직을 총괄할 총장이 있고, 그 밑에 민사·교섭·군사·법무·재무·학무·권업·교통 등 행정부서와 사법적 기능을 가진 사판부(査判部), 이주한인의 민의를 반영하기 위한 중앙의회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남만주 여러 지역에 퍼진 각 한인 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지방 조직이 설치되었다. 1천 호(戶)정도가 되는 구역을 묶어 총관(總管)을 설치하고, 100호 또는 200호로 1개의 구(區)를 만들었다. 총관은 퉁화현(通化縣)의 퉁화(通化)·통남(通南), 환런현(桓仁縣)의 환서(桓西)·환남(桓南)·환동(桓東), 지안현(輯安縣)의 지안(輯安)·집서(輯西)·집남(輯南), 콴뎬현의 관동(寬東)·관남(寬南)·관북(寬北) 등을 비롯해 싱징(興京)·류허(柳河)·린장(臨江)·창바이현(長白縣) 등지에 26개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방 조직 중 환남총관소 총무에 임명되어 자치 활동을 이끌어 갔다. 지방조직원의 임무는 일반 한인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경제 활동을 지도하고, 중국관청의 지나친 착취를 막아주며, 한인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 등이었다. 또한 의무금을 징수해 중앙에 전달하는 업무, 중앙의 정책이나 지시를 한인들에게 전달해 조국을 광복시키고자 한 한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는 업무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치활동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활동 지도업무였다. 통의부는 이를 위해 대규모 농장을 구입해 이를 공동으로 경작해서 참여한 한인들에게 배부하고 나머지는 적립하는 공농제(公農制)를 실시하였다. 대규모 농장을 구입하는 것까지는 중앙에서 계획하고 추진하지만 이를 관리하고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지방조직의 일이었다. 농장이 있는 지역에 공서(公署)를 만들어 그 일을 맡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임무를 수행할 환남지역 공서의 총감(總監)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런데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출발한 통의부는 시간이 가자 간부들 간에 이념적 갈등이 생겨 복벽주의 계열 인사들이 1923년 2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만들어 이탈하였다. 그리고 1924년 중반에는 자치활동보다는 항일무장활동을 주장하는 의용군의 일부가 또 다시 임시정부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 이하 참의부)를 성립해 분리해 나가고 말았다. 참의부에 가입한 세력은 통의부 의용군 제1·2·3·5 중대와 독립소대, 유격대 등 무장 세력이었다. 제3중대를 구성하고 있던 천마산대도 통의부를 이탈해 참의부 구성원이 된 것이다. 따라서 환런현 남부지역에서 자치활동에 주력하고 있었지만, 참의부의 구성원이 되었다. 성립 초기 참의부는 제1중대부터 5중대까지 5개 중대와 독립소대, 훈련대 등 무장조직과 입법기관인 중앙의회, 행정기관인 민사부를 둔 중앙조직을 구성하였다. 민사부가 이주 한인사회에 지방 조직을 설치해 그를 관장하며 자치활동을 펼치기는 했으나, 항일 무장활동을 집중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 편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교적 쉽게 국내로 진입할 수 있는 압록강변의 지안현에 본부를 설치하고 주변의 환런·퉁화·린장현(臨江縣) 등에 중대와 소대를 배치하였다. 무장활동을 노선으로 한 참의부 소속이 되었지만, 여전히 환런현 남부지방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자치활동을 이어갔다. 통의부 소속일 때와 달라진 임무는 지방 조직 내에 경호대와 보험대(保險隊) 등의 무장 조직을 설치해 자치를 위한 민정(民政)활동 외에 무장활동도 겸했다는 것이다. 경호대는 한인사회의 치안을 담당하는 무장 조직이었다. 그리고 보험대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각 중대와 그 소속부대 간의 통신, 유격전을 위해 국내로 진입하는 참의부 독립군의 이동로 안내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환런현 남부지역은 지안현과 마찬가지로 압록강과 접해 있기에 특히 보험대의 업무가 중요하였다. 지방조직이라고는 하나 중앙에 편성된 독립군 조직과 하나가 되어 항일 독립전쟁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였기에 일제는 항시 참의부 독립군의 이동을 주목했고, 수시로 작전을 펼쳐 공격해왔다. 1928년 10월 18일, 일제의 퉁화현 영사관 경찰대는 대병력을 동원해 퉁화·환런·지안현을 다니며 독립군 근거지를 습격하였다. 다음달 8일까지 이어진 퉁화현 일제 경찰대의 이 기습 공격에 당해 천마산대에서부터 함께 활동했던 참의부 제4중대장 김상옥(金尙沃) 등 다른 동지 4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1931년 11월 25일 국내로 압송되었고, 1932년 3월 3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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