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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원

金河源

1888. 9. 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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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하원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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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단천(端川)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단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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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군비단
  • · 광정단
  • · 조선혁명당

포상 정보

  • · 애국장(201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3) 1888년 9월 6일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수하면(水下面) 상농리(上農里)에서 태어났다. 가족관계나 성장관계는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려우나, 경술국치 이전인 1909년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 18도구(道溝)로 건너갔다. 창바이현은 함경도와 접한 국경지방이었기에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일제가 침략을 본격화하자, 이 고장의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건너간 지역이었다. 창바이현은 많은 계곡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지역이었으므로 생활하기는 불편한 곳이었으나, 독립운동을 준비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때문에 다른 지역 출신의 민족운동가들도 이곳으로 와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실력을 양성하였다. 1910년대에 이미 수십 개의 민족학교들이 설립돼 장래 독립운동을 실천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이주해 지리를 잡은 18도구에도 협신(協新)·창신(昌新)·대흥(大興)학교 등 10여 개에 가까운 민족학교들이 설립되어 2세들을 독립군 자원이 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1919년 국내외의 전 민족이 호응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창바이현의 이주 한인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8일 민족학교인 정몽(正蒙)학교 학생들이 시내에서 촉발시킨 만세시위는 순식간에 창바이현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시위가 일어나자 앞장서 군중들을 이끌었다. 만세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열의가 고조되자 서북간도에서는 그 동안 구축한 독립운동기지를 기반으로 독립군단(獨立軍團)들이 성립되었다. 창바이현에서도 1919년 5월경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이 조직되었다. 이 군단이 성립되자 단원이 되어 통신원에 임명되었다. 성립 시 군비단은 단장 이한평(李漢平, 이명 이태걸[(李泰杰)]), 부단장 김동준(金東俊), 총무장 김찬(金燦), 재무장 이동백(李東白) 등이었고, 본부는 17도구 동평덕리(東坪德里)에 설치하였다. 군비단은 본부 이외 현내 여러 지역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하였는데, 18도구에는 대정정(大町亭) 동상리(洞上里)에 제3구 지단이, 소사동(小寺洞) 중장막리(中莊幕里)에는 이 지단 소속의 지부가 설치되었다. 통신원은 지단 또는 지부와 본부를 연결하는 업무, 독립군의 국내진입 시 각 구간을 안내하는 임무 등을 수행하였다. 1921년 중반에는 경호분대장 및 국적부장(國籍部長)에 임명되었다. 독립군으로서 무장활동을 수행하면서 이주 한인을 위한 자치활동을 겸한 것으로 판단된다. 군단의 간부가 된 후 본격적인 국내진입 유격전에 참가하였다. 1921년 9월 제1중대 3소대 소속의 김병묵(金秉默)이 지휘하는 유격대의 일원이 되어 같은 달 23일 함남 갑산군(甲山郡)으로 진입했다. 다음 날 새벽 2시 동인면(同仁面) 함정포리(含井浦里)까지 진출한 유격대는 대원을 2개조로 나누어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동시에 공격했다. 대장 김병묵이 이끈 조는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인 순사부장과 한국인 1명을 처단하고 장총과 권총 등을 전리품으로 회수한 후 주재소에 불을 질러 소각시켰다. 이어 근처에 있는 영림창 사무소로 가 그곳도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면사무소로 향한 조는 숙직하는 면서기를 일으켜 세워 독립군임을 알리고 군자금 49원을 받아냈다. 순식간에 작전을 끝낸 독립군들은 일제의 경찰 지원대가 쫓아올 겨를도 없이 신속한 철수작전을 펼쳐 본부로 귀대하였다. 그런데 창바이현에는 군비단 이외 다른 독립군단들도 근거지를 구축하고 활동하였다. 흥업단(興業團)·광복단(光復團)·대진단(大震團) 등도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구축한 군단들이었다. 군비단은 1922년 2월 초, 이들 군단들과 힘을 합해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창바이현 내 14세 이상 24세 이하의 남자 청년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재로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신적·육체적 훈련을 시켜 민족적 소양을 갖게 되면 이들을 독립군 요원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이었다. 이 신한청년회의 부회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2월 군비단과 흥업단이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성립되었고, 4월에 대진단과 태극단(太極團)까지 통합되면서 광정단(光正團)이 결성되었다. 광정단은 성립초기 17도구 동평덕리에 있던 군비단의 본부를 그대로 총본부로 사용하고, 재무·군사·서무·경호·의사(議事)·권업·문화·통신·회계·위생 등의 부서를 설치해 본부 주변의 여러 지역에 분산 배치하였다. 그리고 한인사회 각 마을의 규모에 따라 부(部)·서(署)·구(區) 등의 지방 조직을 설치하였다. 지방 조직에는 각 조직을 책임질 장(長)과 총무·서기·재무 담당자들을 임명해 행정을 이끌도록 하였고, 경호장(警護長)과 경시(警視)를 임명해 한인 마을의 안전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항일 무장활동은 군사부와 경호부가 주가 되어 수행하였다. 이때 광정단의 경호부 경시에 임명되었다. 광정단이 항일 무장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조동직(趙東稷)을 비롯한 단원들로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 진입활동을 펼쳤다. 주된 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여한 사령장과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국내로 진입해, 친일 부호들의 집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수십 명의 단원을 수시로 교체해가며 부호들의 집을 급습했다. 한 번의 진입 전에 서도 서너 곳을 습격했는데 수십여 부호들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자금을 제공받았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수사망에 감지되어 1926년 6월 혜산진(惠山津) 경찰대에 붙잡혔다. 이 해 9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1월에 풀려났다. 옥에서 나온 후 거처를 고향이 아닌 갑산군 운흥면(雲興面) 대하리(大下里)로 정하고 이듬해인 1932년 이창범(李昌範)·주철(朱鐵) 등과 조선혁명단(朝鮮革命團)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1933년 4월 8일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운흥면 대중리(大中里)에 있는 부호 정치일(鄭致日)의 집을 습격해 130원을 모집하고, 다음 달인 5월에는 갑산군 보천면(普天面)에 거주하는 부호 류명규(柳明奎)의 집을 2회에 걸쳐 습격해 586원의 거금을 받아냈다. 1934년 7월, 자신과 같은 마을인 대하리에 사는 부호 이경희(李京熙)의 집을 기습 공격해 230원을 모집하였다. 1936년 1월 19일에는 혜산읍에 사는 부호 김한(金漢)에게 60원을 모집하였다. 5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활동으로 모집된 자금은, 압록강 넘어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들에게 보내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선혁명단의 활동은 결국 일본 경찰들에게 탐지되어 1936년 중반 다시 붙잡혔다. 함흥지방법원에 이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또 다시 옥에 갇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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