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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묵

金泰默

1894. 3. 2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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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태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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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창성(昌城)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창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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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09)

관련 사건

  • · 차련관주재소 습격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9) 1894년 3월 26일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창성면(昌城面) 운평리(雲坪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택(金澤), 김용묵(金用默)이다. 일제가 기록한 형무소 카드에는 출생 연도가 메이지(明治)38년(1905년) 또는 메이지 18년(1885년) 3월 26일 등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국외용의조선인명부』에는 메이지 27년(1894년) 3월 26일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체포되었을 당시 각 신문의 경우, 『동아일보』 1933년 3월 7, 8일자에는 39세로, 『매일신보』 1932년 2월 24일자에는 38세로 기록되어 있다. 형무소 카드에 첨부되어 있는 인물사진과 독립군 대원으로 활동할 당시 정황 등을 감안해 볼 때 카드의 기록이 오류로 판단된다. 성장 과정이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 상 정확히 알기 어렵다. 만주로 넘어간 경위 또한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1920년 서간도 관뎬현(寬甸縣) 남적황자(南吊幌子)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지단(支團)의 도검찰(都檢察) 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상반기 대한독립단이 평북 독판부(督辦府)·대한청년단연합회·한족회(韓族會) 등과 통합해 광복군(光復軍)을 성립시키자, 이 단체의 구성원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실시하는 연통제(聯通制)에 참여해 창성군 경호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연통제는 임시정부가 1919년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해 국내 행정기관으로서 연통부를 설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국내에 있는 국민들을 임시정부와 연결시키고 결속시키기 위해 시행한 제도였다. 따라서 연통제를 주관할 창성군 임시군청은 관뎬현 향로구(香爐溝)에 있었으나 구성원들의 활동은 국내에서 이루어졌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창성군의 연통제 활동은 특히 활발하게 추진되어 군내(郡內)에 탄탄한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1922년 봄 서간도를 근거지로 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광한단(光韓團)과 광복군에 합류하지 않은 대한독립단의 잔류 세력들이 통합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에는 통군부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 남만주(南滿洲)의 17개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남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이 같이 대규모 통합 독립운동 단체를 성립시킨 것은 일제에 의해 파괴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를 재건하고 보다 활기찬 독립전쟁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약 10여 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성립된 서북간도 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의 국내 진입 활동으로 일제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 10월 약 2만 명의 일본군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켜 이듬해 4월까지 이주 한 인 사회와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시켰다. 4천 명에 가까운 일반 한인과 독립군들이 살상 당하고, 수천 채의 가옥·교회·학교 및 독립군 병영이 파괴되고 소실되었다. 이 같은 상황을 원상으로 복원시키고 중단 없는 항일 무장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통합 독립운동체인 통의부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통의부는 이주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기지를 복원하기 위한 자치기구와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사기구 등, 두 개의 기구로 조직이 편제되었다. 단체를 총괄 책임질 총장은 김동삼(金東三)이었고, 그 밑에 재무·법무·교통·군사·민사·교섭·학무·실업 등 자치 행정기구와 김창환(金昌煥)을 사령관으로 한 군사기구인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이같은 통의부 의용군의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통의부의 중앙행정기구는 광활한 남만주의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기지를 재건할 목표를 가졌기에 각 지역에 지방조직을 설치해 관리하였다. 하지만 의용군은 국내진입이 용이한 압록강변의 관뎬(寬甸)·퉁화(通化)·환런 (桓仁)·지안현(輯安縣) 등에 집중 배치되어 항일 무장활동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의용군 병영 중, 만주로 건너와 계속 머물렀던 관뎬현에 배치되어 수시로 국내진입전을 수행하였다. 유격대를 구성해 주로 고향인 창성군 방면으로 진입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하였다. 1923년 9월에는 같은 소대장들인 이삼현(李三賢)·한용숙(韓龍淑)과 유격대 중대장 문학빈(文學彬) 등과 관뎬현 석주자(石柱子) 대황구(大荒溝)에서 작전 계획을 세워 합동 국내 진입 유격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1924년 음력 2월에는 지제인(池濟仁) 등 부하 대원 8명을 이끌고 벽동군(碧潼郡)으로 진입해 여러 부호들의 집을 기습적으로 들어가 1천 여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처럼 이념을 초월해 하나로 뭉쳤던 통의부는 구성원 간에 이견이 생겨, 복벽주의(復辟主義)계의 전덕원(全德元)·채상덕(蔡相悳) 등이 1923년 초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만들어 이탈하였다. 한 해를 넘긴 1924년 중반에는 자치 활동보다는 항일 무장활동을 주장하는 채찬(蔡燦)(일명 백광운[(白狂雲)]·김원상(金元常) 등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상의한 뒤, 임시정부 직속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해 분리되었다.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잔류 세력은 통의부 성립 시 참여하지 않았던 서로군정서와 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고본계(固本契)·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 등 7개 단체와 통합을 추진해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는 하얼빈– 액목(額穆)-북간도(北間島)의 선을 그어 그 이남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기반으로 하는 자치조직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통의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용군을 편성해 항일 무장활동을 수행하였다. 의군부나 참의부 세력과 동조해 이탈하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가 정의부가 성립하자 제4중대 3소대장에 임명되었다. 이 정의부 의용군에서 흑선풍(黑旋風)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격대장 이진무(李振武)를 만나 함께 활동하였다. 이진무는 1919년 만세운동 후 서간도로 넘어와 대한독립단 소속의 독립군이 된 후 끊임없는 유격전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행동대장이었다. 1925년 7월 이진무와 함께 6명의 유격대를 조직해 평북 철산군으로 진입하였다. 그곳에 있는 일제의 차련관(車輦舘) 주재소를 습격해 4명의 일제 경찰을 저격해 처단하였다. 작전을 마치고 귀대하는 길에도 여러 친일 부호들의 집을 습격해 상당한 액수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외에도 정의부 소대장으로 수차에 걸쳐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 진입작전을 통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1927년 초, 재만 독립운동계는 그 동안 국부적으로 이루어졌던 통합운동이 아닌 남북만주 전체의 독립군 세력을 하나로 뭉치기 위한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처음 목표한 바대로 하나의 단체를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1928년 12월 북만주를 총괄해 이끌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성립시키고, 이듬해 4월에는 남만주의 통일기관인 국민부(國民府)를 성립시켰다. 이때 이진무 유격대와 함께 국민부원이 되었다. 국민부가 성립될 즈음 일제는 만주를 노골적으로 침략해 한국 독립군들이 활동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일제는 1928년 6월 만주의 실권자인 장쭤린(張作霖)이 타고 가는 기차를 펑텐(奉天)(현 선양[(瀋陽)])에서 폭파해 살해하였다. 실권자인 장쭤린이 죽자 침략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일본군 대병력을 만주로 옮기고,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이듬해 3월 1일 괴뢰 ‘만주국(滿洲國)’을 수립하였다. 이 같은 일제의 만주 침략 과정이 행해지고 있을 때 성립된 것이 국민부였다. 국민부가 성립되고 두 달 후인 1929년 6월 유격대를 구성해 관뎬현에 거주하며 독립군의 움직임을 일제에게 전달하고 호의호식하고 있는 밀정 안모(安某)를 처단하였다.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이 같은 작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보다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공격한 뒤 신속히 철수해야 하였다. 그것도 이전과 같이 빈번히 행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이미 확보한 군자금은 오랫동안 견딜 수 있도록 아껴 써야하는데 국민부 간부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군자금은 유격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모금해 온 것이었다. 소문을 듣고 1930년 6월 이진무와 상의한 뒤 유격대를 이끌고 간부들이 거주하고 있는 싱징현(興京縣)으로 갔다.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최악의 경우 그들을 응징할 계획이었으나 중국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같이 간부에 대한 불신임이 일자 이진무는 국민부를 탈퇴하고 1931년 2월 7일 안국형(安國亨)·박인홍(朴仁弘)·홍학순(洪學淳) 등 함께 했던 동지들과 노동자위군(勞動自衛軍)을 조직하였다. 그 해 음력 4월에는 단체의 명칭을 재만조선인혁명군(在滿朝鮮人革命軍)으로 바꾸었다. 1932년 1월 조선인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있다가 일제의 안둥(安東) 영사관 경찰서 일경들에게 붙잡혔다. 일제의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8년 반이 넘는 기간 옥고를 겪다가 1940년 8월 4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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