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의
金昌義1885. 5 ~ 1923.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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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5년 5월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에서 태어났다. 1919년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구성군(龜城郡)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면서 중국 상하이(上海)로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 2월 12일 임시정부 산하 평북독판부(督辦府)의 내무참사(內務參事)로 임명되었다. 귀국한 뒤 고향인 평북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2월 18일 정주 읍내에서 김태규(金泰奎)를 만나 군무부 포고 제1호라는 제목으로 “서로 함께 분기하여 일본제국의 기반을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인쇄물 100여 장을 장종삼(張鍾三)과 임시정부 경성교통국장으로 활동하던 한병주(韓秉柱)에게 교부할 것을 의뢰하고 배포를 지시하였다. 한병주는 이 문서를 김순원(金純元)과 오정주(吳政柱) 등에게 나눠주고 서울에서 배포하게 하였다. 4월 19일에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제2회 정기총회에서 안동교통사무국(安東交通事務局) 참사(參事)로 임명되었다. 29개의 참가단체에서 온 대표 108명이 200여 명의 방청객과 함께 모여서 통일기관의 설치를 의논하였다. 총회에서는 군자금을 모금하고 의용대를 조직하며, 임시정부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1921년에는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행적이 일경에게 발각되자 추격해오는 일경과 교전 끝에 포위망을 뚫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23일에 환런현(桓仁县) 마권자(馬圈子)에서 각 독립운동 단체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 여러 단체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해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개최하였다. 남만한족통일회에 백남준(白南俊)·장수해(張水海)·이달성(李達盛)·정도산(鄭道山) 등 5명과 함께 광복군총영 대표로 참석하여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으로 구성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설립하는 데 일조하였다.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비서 겸 선전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한통의부는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성원들 간에 갈등이 노출되어 분열 위기에 직면하였다. 간부들 간에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양기탁(梁起鐸) 측과 복벽주의를 주장하는 전덕원(全德元) 측으로 나뉘어졌고, 이념적인 갈등은 군권을 둘러싼 인선 및 조직상의 이견으로 번졌다. 결국 대한통의부 선전국장으로 활동하던 중 양자 사이의 무력충돌 과정에서 1923년 4월 관전현(寬甸縣) 소아하(小雅河)에서 전덕원의 부하 20여 명에게 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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