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진택

金鎭澤

1882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진택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고원(高原)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고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태극단
  • · 광정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1882년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 산곡면(山谷面) 건천리(乾川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국태(金國泰)이다. 가족관계와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 상 알기 어렵다. 1918년 3월 고향을 떠나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으로 망명하였다. 창바이현은 함경도 출신 한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한 지역이었다. 같은 고향 사람들이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었다. 망명과 동시에 삶의 기반을 마련해 가며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창바이현의 한인들과 적극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계속해 만세운동으로 고취된 독립정신이 식지 않도록 창바이현과 그 주변 지역인 임강(臨江)·안도현(安圖縣)의 한인 사회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서간도 이주 한인들의 민족정신 고취에 노력하고, 얼마 후 임강현 화개산(花開山)에서 태극단(太極團)이 성립하자 단원이 되었다. 임강현은 근대시기 서간도지역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한인의 이주가 시작된 지역이었다. 1830년대 초부터 시작된 임강현으로의 이주는 해가 갈수록 늘어나 1900년대 초가 되면 8천명이 훨씬 넘는 한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는 서간도지역 중 집안현(輯安縣) 다음의 대규모 한인 거주지역이고, 이들 두 지역에 이은 3번째는 약 5천 6백여 명이 한인사회를 형성한 창바이현이었다. 조인관(趙仁官)·정삼승(鄭森承)·김동준(金東俊) 등이 주도해 조직한 태극단은 임강현 본부 외 창바이현에 지단(支團)까지 설치한 독립군단(獨立軍團)이었다. 서간도에서 많은 이주한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본부와 지단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들 양 현(縣)의 이주 한인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은 태극단은 약 2천 명의 단원을 보유했음을 자체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단원 모두가 무장 활동 인력은 아니었을 것이나 설립 초기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을 것으로는 판단된다. 태극단은 단원 중 무장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젊은 청년들로 의용대를 편성해 다른 독립군단들과 마찬가지로 활발한 국내 진입전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태극단과 같은 재만(在滿) 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의 국내 진입 유격전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그리고 경신참변(庚申慘變)(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이라는 만행을 자행해 이듬해 4월까지 한인 사회와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일제의 침략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일시적 피전책(避戰策)을 택해 많은 인원이 서북간도의 근거지를 떠나 북만주(北滿洲)의 밀산(密山)을 거쳐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했다. 이 때 태극단 소속 독립군 일부도 함께 건너갔다. 만주의 독립군들은 1921년 3, 4월경 소련의 알렉세호스크(자유시[(自由市)], 흑하[(黑河)])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후일을 기약하며 이동했던 독립군들은 이곳에서 큰 수난을 겪게 되었다. 연해주지역 한인 독립군들은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이동해 오자 이들을 서로 자신들의 세력으로 편입하려는 알력을 보였고, 소련측의 압력까지 가세되어 큰 갈등을 일으키다가 무력 충돌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참담한 상황을 맞았으나 화를 면한 독립군들은 다시 병력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1년 11월 서간도에서 이동해 온 각 독립군단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 광복단 서기(書記)의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태극단이 아닌 광복단 대표가 되어 참가하게 된 것은 두 단체가 합병했기 때문이었다. 서간도에 남아있던 양 군단의 잔류 세력은 그 해 5, 6월경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통합하여 광복단이란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두 군단의 통합 소식을 연해주 이동세력에게 까지 전해 하나의 군단으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각 군단의 대표들은 회의에서 알렉쎄호스크에 머무르고 있던 독립군들을 연합해 조선독립단연합총회(朝鮮獨立團聯合總會)를 결성해 하나의 지휘체계 하에서 움직일 것을 합의하였다. 총회의 회장은 문창범(文昌範)이 선임되었다. 연합총회 소속 각 독립군단들은 1921년 말과 1922년 초, 각자 서간도의 원래 근거지로 돌아왔다. 1922년 2월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가진 흥업단(興業團)과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일부가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만들었다. 이어 한두 달 후인 3, 4월경 대한국민단은 대진단(大震團)과 태극단을 통합해 광정단(光正團)을 성립시켰다. 광정단에 참여한 태극단은 광복단과의 통합 시 참여하지 않은 잔여 세력이었다. 이 통합 군단인 광정단의 재무부장에 임명되었다. 소속 독립군들이 모집해 온 군자금 또는 의무금을 관리하는 직책이었으나 자신이 직접 만주와 국내로까지 진입해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중 1923년 8월 20일 유영기(劉永基)·김화성(金和聲) 등과 중국경찰에 붙잡혀 일제의 혜산진 경찰에 넘겨졌다. 1923년 11월 함흥지방법원 북청지청에서 징역 2년을 받고, 경성복심복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채영국⋮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