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석
金允錫1886. 1. 2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장진군 상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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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7) 1886년 1월 28일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상남면(上南面) 서덕리(西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장진군 상남면에서 펼쳐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진군은 깊은 산간지대에 위치해 있어 만세운동 소식이 뒤늦게 전파되어, 3월 14일 신남면(新南面) 고토리(古土里)에서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4시가 되자 고토리 주민 200여 명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헌병주재소 앞에서 더욱 소리를 높여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분노한 주민들도 이에 맞서며 양측의 충돌은 격렬해졌다.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개시하였고, 주민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헌병대 건물로 진입하였다. 탈주한 헌병보조원이 다른 지역의 헌병대에 연락하여 추가 병력이 마을에 도착하였고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이날의 만세시위로 100명의 주민이 체포되었다. 고토리 마을에서 전개된 만세운동과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소식은 곧장 장진군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고토리의 비극을 듣고 같은 마을에 살던 주의규(朱義奎), 옆 동네인 운수리(雲水里)에 살던 한국림(韓國林)·주병찬(朱炳賛)을 만나 상의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덕실리(德實里)는 상남면사무소가 소재한 지역으로 주민들과 만세시위를 벌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차에 덕실리헌병주재소 헌병보조원 나치준(羅致俊)이 찾아와 주의규와 함께 헌병주재소로 동행하자고 하였다. 헌병주재소 동행을 거부하고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헌병보조원의 방문으로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되어 실패가 예상되자, 시위를 준비하던 한국림·주병찬과 함께 나치준의 뒤를 밟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서덕리 황도일(黃道日)의 집 부근에서 나치준을 공격하였다. 한국림과 주병찬이 손으로 나치준을 구타할 때 몽둥이를 들고 함께 공격하였다. 그리고 부근에 위치한 이동술(李東述)의 집으로 나치준을 끌고 가서 포승줄로 묶어 도망가지 못하게 한 뒤 다시 3월 19일 거사를 준비하였다. 3월 19일 거사 당일이 되자 200여 명의 주민을 규합하여 서덕리·운수리·덕실리 등 상남면의 여러 마을을 돌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민의 만세시위에 놀란 덕실리 헌병주재소에서는 곧장 시위대를 저지하였다. 이날 시위로 56명의 주민이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6월 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 상해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신청하며, “조선 민족으로 정의·인도에 근거한 의사 발동이므로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해 7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월 25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임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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