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준
金有俊1878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화서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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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3) 충청북도(忠淸北道) 보은군(報恩郡) 산내면(山內面) 산도촌(山道村)에서 태어났다. 판결문에 따르면 187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신발 만드는 일을 하다가 김화서(金化瑞)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한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확산되자, 이에 저항하여 전국적인 의병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김천만(金千萬)으로도 불린 김화서는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출신 의병장으로, 1907년 11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3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안의군(安義郡), 거창군(居昌郡), 함양군(咸陽郡)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김화서 의병부대에 합류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활동시기로 미루어 볼 때 1909년 초 전후 시기인 것으로 여겨진다. 김화서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주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활동을 맡았다. 1909년 3월 25일 김화서의 지휘 아래 심낙준(沈落俊)·오낙삼(吳落三)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경상남도 합천군 을산면(乙山面) 화양동(華陽洞)에 사는 참봉 윤석우(尹錫佑)로부터 돈 25원과 엽전 8관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또 5월 18일에는 경상남도 삼가군(三嘉郡) 고현면(古縣面) 장기동(場基洞)에 있는 시장 주변을 정찰하라는 명을 받고 동료 2명과 정찰하던 중 붙잡혔다. 이를 알게 된 동료들이 소리를 지르고 시장 곳곳에 방화를 해서 혼란을 일으켜 구출한 일도 있다. 1909년 6월 19일에는 해인사(海印寺) 불제(佛祭) 때 참배자들이 여는 도박장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위기를 겪고도 굴하지 않고 계속 활동을 이어갔으나 그 해 7월 4일에 동료인 심낙준 등과 함께 붙잡혔다. 강도 및 방화로 기소되어 1910년 7월 29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1910년 9월 6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원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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