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화
金永化1882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영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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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5) 전라북도 고부군(古阜郡)남부면(南部面, 현 정읍시 고부면) 토촌(土村)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1909년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李斗璜)이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보낸 「폭도에 관한 건」 이라는 보고서와 재판 기록에 모두 당시 28세로 나와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집안 배경과 성장 과정에 대해서도 확인되지 않지만, 날품팔이를 생계로 삼았다는 것으로 보아 가난한 하층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진(金永鎭), 일명 김참봉(金參奉)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김영진은 출신 배경을 알 수 없는 의병장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당하여 국망의 위기가 현실화되자 거의(擧義)하여 서응오(徐應五)와 김내서(金乃西)를 비롯한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1908년 11월부터 김영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주로 군수품을 옮기고 식사를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영진이 2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부안군 장곡리(長谷里)와 노정리(露亭里)에서 활동 중일 때 군수품을 옮기고 주변 이장들로 하여금 식사를 조달하도록 주선하였다. 이후로도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09년 6월 26일 고부군 성포면(聲浦面) 율치(栗峙)에 있는 주막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머물다가, 1909년 6월 18일부터 전라북도 일대를 수색 중이던 8명의 고부경찰서 순사대에게 붙잡혔다. 1909년 7월 2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폭동죄 종범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10년 8월 대사령으로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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