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묵
金義默1899. 3. 2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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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5) 1899년 3월 21일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판면(板面) 판평동(板坪洞)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소속 단원으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은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 해 3월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하여 결성된 단체로, 평북 출신의 청년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조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자에 대한 후원, 임시정부의 정책·정령(政令)을 선전하는 기관지인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 발행 등이 주요 활동이었다. 그러던 중 그 해 9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활동이 일시 정지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중국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로 흡수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평북 의주군(義州郡) 일대에서 천마산대(天摩山隊) 대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시흥(崔時興)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1921년 8월 탈퇴하였던 김의선(金義善)과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천마대(天馬隊)·천마별영(天摩別營)·철마별영(鐵馬別營) 등으로도 불렸던 천마산대는 중국 관뎬현(寬甸縣)에 있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일제 경찰기관과의 유격전 등으로 인해 감시와 추격을 받게 된 천마산대는 이를 피하여 인근의 두룡산(頭龍山), 초산(楚山)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가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는데, 이와 연계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의선 등은 광복군의 도장과 영수증 등을 가지고 초산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고향인 평북 초산군 판면에 거주하는 임정하(任貞河), (任鼎河)·김두병(金斗炳) 등과 함께 1921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초산군 판면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0월 12일 김봉기(金鳳基)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구하여 11월 24일에 30원을 징수하였다. 그 해 11월 16일 오후 9시경 김규락(金奎落)의 집과 송기언(宋技諺)의 집에 각각 들어가서 군자금을 징수하려다 현금이 없자, 12월 1일 다시 이들의 집에 가서 각각 50원씩을 징수하였다. 같은 날인 11월 16일 11시에는 주문규(朱文奎)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구하여 이후 11월 24일에 20원을 징수하였다. 이외에도 11월 16일에는 초산군 내 이병우와 유정화의 집에서도 군자금을 요구하여 이후 12월 1일 다시 이들의 집에서 각각 30원씩을 징수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2년 2월 14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강도와 주거침입을 이유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동지들과 함께 즉시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상고권은 포기하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4월 28일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5월과 1927년 5월에 상표 1개씩을 받고, 각각 칙령 제10호와 칙령 제12호에 따라 징역 6년 1월 12일로 감형되었다. 형기 종료일인 1928년 6월 24일을 2개월 앞둔 그 해 4월 25일 신의주형무소에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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